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루카 7,12)
희망을 걸고 있던 외아들이 죽으면 그 과부는 슬퍼합니다. 특히 ‘과부’라는 입장은 자식 말고는 더는 그 어떤 희망도 없는 존재를 의미하지요. 남편이 없는 여인은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해 나가야 하고 그나마 자식이 장성하면 자신의 노후를 맡길 생각이었는데 바로 그 자식이 죽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죽은 아들은 우리의 죽은 영을 의미합니다. 슬퍼하는 과부는 그 죽은 영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들이지요. 우리는 지상의 생을 살아가면서 소위 물질적 세상이라는 ‘남편’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영원한 생명이라는 ‘아들’에 대한 희망을 조금씩 키워 나가지요.
그러나 죄는 우리의 외아들을, 즉 우리의 영혼을 죽여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을 두지 못하는 채로 슬픔에 잠겨 죽음이라는 이름의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예수님이 다가옵니다. 죽은 이를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지요. 그리고 그분은 단 한 번의 명으로 그 죽은 아들을 되살립니다. 그러자 그 죽은 아들은 일어나 말을 하기 시작하지요. 즉,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말을 시작한 것은 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모든 이가 하느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지요.
인간이 절망할 때는 외적인 환경이 극적으로 비참해질때가 아닙니다. 인간이 가장 절망할 때는 ‘영원’을 상실할 때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분주히 살아가는 이들이 있고, 무덤을 향해서 달려가는 이들이 있으니 큰일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도 사랑하시고 관심을 보이시지만 그들이 예수님에게 일을 하시도록 허락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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