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6)
그때에는 흐리멍덩한 도덕적 상태는 용납되지 않을 것입니다. 최후의 순간, 우리의 자유의지가 시험을 마무리하는 순간, 하느님의 자비는 사라지고 하느님의 정의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우리 안에 남아 있던 모든 요소들이 하느님 앞에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우리는 마지막 한 닢을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의 자유의지의 근본 방향에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도 있고 세상의 자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은 구분하는 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이 추구하는 참된 부모가 누구인지를 바라보면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을 추구할 것이고, 그분의 사랑을 닮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자녀들은 세상을 추구할 것이고 세상 안에서 통용되는 법칙을 준수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는 ‘용서’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해코지를 당하더라도 용서할 수 있고 용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용서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하신 것이고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용서라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유명한 주님의 기도에도 그 구절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세상은 용서가 없습니다. 세상은 합당한 거래를 할 뿐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을 반드시 기워 갚아야 하고 손해를 모조리 메꾸어야 그때서야 비로소 ‘용서’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용서가 아닙니다. 손해를 다 기워값는 거래를 성사시킨 것이지요. 세상의 어떤 은행도 신용 불량자가 자신이 끼친 손해를 다 기워 갚으면 다시 복권을 시켜주게 마련입니다. 심지어 어둠의 세력들, 조직 폭력배들도 손해를 다 갚고 이자를 다 청산하고 나면 기꺼이 용서를 해 줍니다. 하지만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이미 상정된 거래인 것이지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이유는 진정한 의미의 용서를 베풀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 그 어떤 형태의 부정적인 가치도 없어야 합니다. 증오, 원한, 시기, 악의와 같은 것들을 모두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가두어 놓은 그 감옥에서 결코 나오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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