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3-24)
예수님은 두 종류의 생명에 대해서 언급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를 향해서 우리가 쏟는 관심은 반비례한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하나를 신경쓰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됩니다.
그 두 종류의 생명은 육신의 생명과 영신의 생명, 즉 영혼의 생명이자 영원한 생명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누구나 잘 아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바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일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육신의 생명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지요.
반면 영신의 생명, 즉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우리는 무지합니다. 거의 아는 바가 없지요. 그래서 그것을 찾을 줄도 모르고 추스릴 줄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이 영신의 생명을 숨쉬고 살아왔습니다.
맑은 마음을 지닌 이는 이 영신의 생명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이 영신의 생명을 지닌 사람은 정직하고 책임감있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주 어릴 때에는 우리의 순수함으로 인해서 이 영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를 지으면서 이 영신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잃은 영혼의 기쁨을 전혀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지요. 바로 육신의 쾌락에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갖가지 쾌락을 최고로 누리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돈’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돈이 있어야 자신의 육신의 안락과 쾌락을 최대치로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어른이 되어서도 이 영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은 육신의 안락에 대해서 큰 미련이 없습니다. 그는 다만 하느님이 선물하신 것으로서 육신을 대하고 보살필 뿐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책임감있게 돌보지만 육신에 얽매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 두 생명의 결론은 이미 나 있는 상태입니다. 육신의 생명은 언젠가는 꺼지게 됩니다. 문제는 그때에 우리의 영신의 생명이 어떠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육신의 생명을 스스로 내어바쳐 희생의 제물로 삼아 영혼의 생명을 활활 태우는 사람이 될 것인지, 아니면 육신의 생명을 극도로 누리기 위해서 영혼의 생명을 무시하고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3-24)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아주 명백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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