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지 이틀 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장례를 하러 갔지요. 가는 동안 물어보니 태어나면서부터 심장에 문제가 있었고 그래서 수술을 해서 잘 된 것 같았는데 그만 죽어 버렸답니다.
“한 어린 아이가 왜 세상을 떠나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지요. 아마 다양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맑은 영혼이 하나 필요하셨던지, 아니면 이 아이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였던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들이 수두룩하겠지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생명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아이의 죽음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돌아 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인간은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 자란 성인의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그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회개를 위한 연장을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을 더욱 빛내고 밝히라고 세상에 남겨두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비단 사제에게서만 들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목소리는 내 주변의 선한 이들을 통해서 들려옵니다. 남편의 처지를 걱정하는 아내의 목소리, 젊은 자녀들의 비행을 걱정하는 부모님의 목소리와 같은 것들이 모두 하느님의 목소리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그릇된 욕구는 우리를 눈멀게 해 버립니다. 우리가 색안경을 끼고 있으면 사물들이 정상적인 색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욕구에 사로잡혀 있으면 우리는 좋은 충고를 ‘성가심’으로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기피하고 꺼려하게 되지요.
안타깝게도 이런 장님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보아야 하고 어디로 가야 할 지 모르는 채로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갑니다. 왜냐하면 저의 목소리는 바로 살아있는 이들, 여전히 귀가 뚫려 있어서 제 말을 들을 수 있는 이를 위한 것이니까요.
오늘 우리 앞에 제시된 한 아기의 죽음 앞에서 우리 스스로의 죽음을 잘 묵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언제든지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상기하고 잘 준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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