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르 12,29-31)
사랑에 무슨 차이가 있겠나 싶겠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먼저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순서가 바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이웃사랑이 이어집니다. 물론 이 두가지 사랑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엉뚱한 가정이지만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은 채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만일 이웃에 대한 사랑이 참된 것이면 당연히 하느님을 향한 사랑을 내포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 인간 관계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웃을 향한 애정어린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러한 사랑을 ‘하느님 없이’ 이루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할 수 있지만 ‘하느님’을 벗어나서 사랑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합니다. 즉, 자기 자녀가 다른 아이를 실컷 패주고 오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은 그 자녀가 그러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가르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자녀를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는 자기 자녀를 두둔하고 나서지요.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벗어난 이웃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안락한 삶을 제공하기 위해서 이웃의 재산을 슬쩍했다는 가장도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하느님을 벗어나서 행하는 이웃을 향한 사랑은 그 자체로 길을 벗어나고 마는 것이지요.
사실 이들의 이웃사랑은 그 자체로도 합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이웃’과 ‘그 밖의 사람’을 나누고 자기 이웃만 사랑하려는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합당하지 않은 이웃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게는 모든 이가 당신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제외되는 이웃은 없는 셈입니다.
국가간의 이기주의와 공동체간의 이기주의는 모두 하느님 사랑에서 벗어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가장 우선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녀야 하고, 바로 그 사랑에서 자양분을 얻어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그 하느님은 심지어 죄인까지도 품어 안고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이시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마지막 심판을 하느님에게 맡기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서로 사랑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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