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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인내, 수용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 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 (2디모 2,11-12)

그분과 함께하는 우리의 죽음에서 보장된 것은 그분과 함께 살아남

그분과 함께하는 우리의 인내에서 보장된 것은 그분과 함께 다스림

그분을 거부하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부정

그러니 이 자명한 사실을 두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분을 안다고 하고, 그분과 함께 참아 견디고, 그분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의 삶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 말인즉슨 이 땅에 주어진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일을 해도 휴식을 취해도 모든 것을 ‘나’를 위주로 운영해 온 셈이지요. 그래서 나에게 유익한 것은 취하고 나에게 부정적인 것은 거부하는 식의 삶을 살아 왔습니다. 헌데 그 분별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초라해서 우리는 때로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해가 되는 것마저도 필요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하고, 또 우리에게 유익한 것도 내쳐버리곤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또 그분을 위해서 살다가 그분과 함께 죽기까지 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내어바쳐야 하는 것이지요. 죽음이라는 것을 단순한 일회적이고 최종적인 결과로만 생각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참된 죽음은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에게 봉헌할 때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의지를 우리 안에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일종의 죽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인내라는 것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중요한 덕목입니다. 우리는 참아 견뎌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올바른 길에 들어서고 나면 마냥 꽃길만을 만나지는 않습닏.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만족을 끌어안고 사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도움이 필요한 이를 찾아서 우리 밖으로 나서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아 견뎌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인내를 한껏 발휘할수록 우리 내면의 무언가가 점점 커져 나갑니다. 그것은 바로 ‘진실한 사랑’이지요. 그리고 그 사랑이 커지면 커질수록 훗날 우리가 주님과 함께 다스릴 수 있는 영역도 커지는 셈이 됩니다. 마치 우리의 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가 더 많은 일을 맡을 수 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사랑’이 다스리고 따라서 사랑이 많은 사람이 더 많이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키우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인내’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거부하는 이들의 운명은 비참합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거절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주님이 앙심을 품고 있어서 그들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거절 자체가 자신이 주님에게 다가서기 합당하지 않은 자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집은 깨끗해서 누구든지 자신을 주님의 손에 맡겨 씻기는 사람이면 들어갈 수 있는데 그 맡기기를 거부해서 여전히 더러운 상태로 남아 있는 이들은 주님의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세척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지만 그것을 전혀 이용하지 않은 것은 바로 본인의 탓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역사 안의 한 인물에 대한 지적 긍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긍정을 말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을 결심하는 것이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단순히 세례를 받고 미사를 빠지지 않고 나온다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외적 형식들은 내적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하느님은 결국 숨어 있는 것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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