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루카 7,47)
때로 삶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던 것들이 갑자기 소중해지는 순간들이 다가오곤 합니다. 평소에는 숨쉬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물 속에 잠수를 하고 나서 몇 초 기다려보면 그 공기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곤 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무언가 늘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의 존재라든가 가족의 일치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잃고 나서 느끼는 소중함들입니다.
하지만 평생을 두고서도 거의 깨닫지 못하는 핵심적인 중요성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느님과 그분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올바로 깨닫고 살아가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것이 가장 부족하게 느껴지는 때에도 하느님은 우리를 은총으로 붙들어 주시기에 실상 우리가 은총 없이 살아가는 때는 한 순간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른 말로 우리의 진정한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보살핌은 우리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거부할 뿐이지요. 우리는 애써 그 보살핌에서 멀어지려고 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추구하곤 합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얻고자 노력하지요. 그러다가 은총의 끈을 놓쳐버리는 일이 일어나곤 합니다. 바로 ‘죄’를 짓게 되는 것이지요.
인간이 죄를 지으면 무엇보다도 양심에서 바로 신호가 옵니다. 마치 물에 빠지고 나면 숨을 참는 것을 견딜 수 없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요. 영혼의 질식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존재라서 그러한 질식 상태에서도 삶을 유지할 수 있고 심지어 익숙해지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양심이 질식하고 마비가 되면 그때부터 인간은 육신의 쾌락을 뒤쫓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유일하게 자신을 만족시키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허한 인간의 찬사들을 추구하느라 자신의 외모를 꾸미고 세상의 권력과 지위를 공고히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그를 내버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또 기회를 줍니다. 그러다가 한 영혼이, 즉 질식해 죽을 것 같던 영혼이 그 기회를 붙들고 다시 죽음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영혼은 크게 숨을 몰아 쉬면서 자신을 구해준 이에게 감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둠의 심연 더욱 깊이 파고들어 있었던 사람일수록, 그 고통의 시간이 더 괴롭고 힘들었던 사람일수록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더욱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이치겠지요.
그래서 그는 ‘사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분을 향한 감사와 사랑을 시작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의 감사는 보다 실제적인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로 드러나게 되지요. 수많은 이들이 평소에 늘 즐기던 거라 별다른 감흥이 없는 중에 그 죽음의 문턱에 있었던 이는 모든 것을 새로이 바라보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감각하게 미사에 참례하는지 모릅니다. 그 은총의 거대한 잔치에 별다른 준비 없이 다가오는 것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왜 그 미사를 소중히 여겨야 하는지 모릅니다. 자신들로서는 별달리 느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런 이들이야말로 가장 영혼이 질식해 있는 이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영혼이 너무나 심연에 가라앉아 있어서 스스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인 것이지요.
별다른 죄가 없으니 나는 의인이라는 생각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는 법률에 규정된 죄를 짓지 않아서 자동으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즉 하느님의 은총이 내 안에 숨쉬고 있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작 의인들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깁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 우리는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어 사랑을 드러낸 여인은 어쩌면 그것을 꼴사나운 눈길로 쳐다보는 자칭 의인들보다 훨씬 더 의롭게 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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