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루카 1,63-64)
혀가 묶인 사람은 말을 하지 못합니다. 즈가르야는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르는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는 남들의 호기심을 살 만한 말들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느 연예인이 결혼을 했고, 성형을 했고, 지금 사회 문화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이 이런 저런 것이라는 이야기를 잔뜩 하지요.
하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를 바라고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런 그들의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잔뜩 하지만 그런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진솔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야기꾼을 찾습니다. 누군가 진실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요.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방적인 관계이기 때문이지요. 상호적인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하느님의 자리를 만드는 것, 우리가 이미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에 우리는 비로소 혀가 풀리게 되고,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야말로 진정으로 우리를 들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 이유도 바로 그분에게서 찾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고 비웃었다가 혀가 꼬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명하는 순간 혀가 풀려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즈카르야처럼 진솔한 영혼의 말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세상의 수많은 이슈들을 의미없이 반복하고 있을까요? 한번 성찰해 볼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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