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고통


인간은 고통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떤 유형의 고통이든 일단 피하려고 보는 것이 통상적인 반응입니다. 하지만 모든 고통이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몸을 키우기 위해 운동이 필요하고 정신을 확장하기 위해서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육과 훈육이 필요합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철이 들어서 이 교육과 훈육을 스스로 받아들인 아이는 그에 힘입어 앞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고통을 어떻게든 기피하려는 아이들도 있으니 이런 아이들에게는 합당한 인도자가 필요하게 됩니다.

영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영혼에 고통이 가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하려고 하지요. 하지만 영혼에 유익하고 필요한 고통이 있습니다. 헌데 사람들은 이를 회피합니다.

영혼은 과연 무엇이고 무엇이 영혼에 고통스러울까요? 육신은 살과 근육과 뼈로 이루어져 있고 이러한 것들을 단련시키는 방법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정신은 감정과 이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역시 그에 상응하는 훈련법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영혼 안에는 ‘의지’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이 의지에 반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고, 이 의지를 훈련하는 것이 영혼의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는 대부분 ‘자기 자신’으로 방향 지워져 있습니다. 이를 다른 표현으로 ‘이기심’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지요.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알아 나가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모든 촛점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그런 인간에게 보다 더 큰 존재가 있다는 것을 각인시키는 작업, 즉 우리의 영혼을 만드신 분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작업이 바로 ‘신앙’을 가르치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모든 교리교육은 바로 이 영혼의 훈련을 기본 바탕으로 삼습니다. 즉, 하느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리고 그분의 뜻을 전하고 그 뜻에 순명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간은 고통스러움을 피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에 반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하느님의 뜻을 피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 시키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욕구는 자신의 육신에서 비롯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육신의 욕구를 채우는 최고의 수단은 바로 세상에서 으뜸으로 생각되는 것들이지요. 바로 부귀 영화, 명예, 권력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난 이기적인 인간은 이러한 것들에 집착하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게 마련입니다.

창조 후에 일어나게 된 인간의 이런 이기적인 상황을 알고 계셨던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서 원조를 하기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품은 예언자들을 꾸준히 보내 주셨지요. 하지만 고통을 싫어하는 이들이 그런 예언자들을 받아들일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절 당하고 박해 당하고 배척당하고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마침내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십니다. 바로 당신 자신이 다가오시기로 한 것이지요. 가장 큰 사랑으로, 가장 큰 자비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당신의 본 뜻을 전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이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가장 큰 사랑의 본보기를 남긴 것입니다. 사람들을 돕고 사랑하고 가르치다가 결국 사람들에 의해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지요.

인류는 이제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본보기를 지니고 있고 나아가야 할 모범적인 방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기적이고 세상적인 쾌락과 탐욕에 빠져들어 있지요. 하느님은 그래서 당신의 거룩한 영을 사람들에게 보내십니다. 성령이라고 불리는 이 하느님의 영은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다시 사람들에게 일깨우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말씀을 보전한 것도 이 성령이고,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하느님과 당신 외아들의 사랑과 자비를 말과 행동으로 실천해 보이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영의 작용에 의한 것입니다.

이 일이 언제까지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정하신 순간까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르지요. 그러니 당신의 영을 받은 이들로서는 그 때가 온전히 다 찰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일할 뿐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이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고 자기 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살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으고 쌓고 그러다가 자신에게 주어진 때가 다 되고 나면 죽어 흙으로 묻혀 버리고 말지요. 성령의 감도를 받은 이들은 하느님의 일을 계속합니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구하고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 하지요.

하느님은 당신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길거리에 나가서 누구든지 불러 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때가 거의 무르익은 셈이지요. 자비를 선포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금씩 그 뜻을 알아듣고 돌아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조차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심지어 하느님의 뜻을 잘 아는 사람들, 잘 알아야 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올바로 캐치하지 못하고 서로 다투고 싸우느라 바람 잘 날이 없을 지경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런 풍파 안에서도 고요히 잠을 청하실 수 있었던 예수님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할 남은 일은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새로운 희망을 전하고 알리는 것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