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다는 것을 지나치게 ‘추상화’ 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믿음은 지극히 내적인 작용입니다. 그것은 물건을 이리 저리 옮기는 것과는 달리 내면의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이지요.
하지만 그 믿음은 아주 자연스럽게 외적인 결과물을 동반합니다. 즉, 믿는 사람은 믿는 대로의 실천이 뒤따르는 법이지요.
사람들은 흔히 성경의 ‘말마디’에 집착해서 ‘믿음이냐 행위냐’를 곧잘 따지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세세하게 짚어보면 다음과 같은 세분화 과정을 거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행위
순수한 믿음
믿음이 있는 행위
1. 믿음이 없는 행위
먼저 살펴볼 것은 믿음이라는 근본을 두지 않은 행위들입니다.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는 데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동기’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헌데 인간은 그 동기를 얼마든지 자신의 이기성에서 끌어내어 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기적인 동기들을 ‘종교적인 형태’로 얼마든지 포장할 수 있지요. 누군가 성당을 열심히 나간다는 것이 무턱대고 칭찬할 만한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가정사를 내팽개치고 성당활동에 광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오히려 올바로 지도를 받아야 할 일이지요. 성당 안에서 여러가지 누리게 되는 혜택을 위해서 성당에 나갈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연애를 하기 위한 청년회 활동이라던지 아니면 같은 나이또래 끼리 어울려 즐기기 위한 교사회 활동도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동체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공동체는 저마다의 인간적인 필요를 채우는 곳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러한 모든 활동 가운데에서 믿음은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2. 순수한 믿음
인간이 처음부터 믿음이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한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자격증과 같이 모종의 과정을 거치면 자동으로 수료해서 얻게 되는 식의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단 한 순간의 마음의 결심으로 얻어질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얻게 되는 순간은 그야말로 ‘찰나적’입니다. 인간이 믿지 않는 상황에서 믿음으로 돌아서는 순간은 시간으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세례를 받는다고 모두가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요, 또 구체적인 세례 행위가 없었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고 말하기도 힘든 것입니다. 물론 세례라는 것을 받으면 어느 정도는 기본적으로 이 사람이 믿음으로 다가서려고 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행위가 되긴 하지만 정말 마음이 없으면서도 원하는 목적을 위해서 남들을 속여가면서 세례를 받을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안에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 하느님만이 아는 문제인 것입니다.
3. 믿음이 있는 행위
하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자연스럽게 그에 상응하는 행위가 수반됩니다. 바로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나는 행위들이지요. 속에 향수를 품고 있는 도자기는 저절로 향수가 흘러나오게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그 지닌 믿음이 저절로 외적으로 흘러나오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그는 열매를 맺기 시작하게 됩니다. 그 열매라는 것은 다른 이들로 하여금 빛을 바라보게 도와주고 빛을 향해 나아오게 도와주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영혼들을 얻는 것이지요. 이러한 믿음을 통한 행위는 앞서 말한 믿음이 없는 외적 종교활동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온유하고 친절하고 인내롭고 겸손하고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에 누가 봐도 그의 믿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반면 믿음이 없는 단순한 외적인 활동은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속내가 없는 활동들이지요.
어느 종파에서 흔히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구호는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 3,8)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마태 3,10)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 (마태 7,15)
나무는 그 열매를 보면 안다. (마태 12,33)
여러분은 순수한 믿음을 지니고 그 믿음을 통해서 이루는 아름다운 행위로 열매를 맺는 이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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