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개와 돼지



가치를 모르고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이에게 좋은 선물을 억지로 주어서 무엇하겠습니까? 그는 그 선물을 방치하고 망가뜨릴 뿐입니다. 좋은 선물은 그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마태 7,6)

이미 여러번 언급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어리석은 시도를 하지요. 혹자는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다시 사랑하기 위해서 또 한 번 시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분별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그가 받아들일 만한 것을 선별해서 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대학교재를 주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면 그 아이의 수준에 합당한 것을 건네어야 합니다. 혹은, 그 아이의 수준에 합당한 보살핌과 충고를 해 주어야 하지요.

사랑은 그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반드시 상대를 살리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제는 제3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제는 그 당사자의 자유의지와 하느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3자는 그가 깨달음을 얻게끔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내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 선물을 이미 여러차례 내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는 같은 선물을 주면 안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에게 선사하신 아름다운 것을 그가 허비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알지 못할 때에 그가 겉으로는 아무리 번지르르한 옷을 입고 입으로 교양있는 말을 쏟아낸다고 할지라도 그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짐승’에 대한 표현은 실제로 네 발로 걸어다니는 존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 그래서 그분의 선과 드높은 사랑을 감지하지 못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것은 그 거룩한 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집안에 잘 모셔둘 성모상이나 십자고상을 이제 옹알이를 하는 아이의 손에 맡겨서 그 아이가 그것을 부숴뜨리게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것들은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어야 합니다.

거룩한 가르침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가 강론대에서 하는 가르침이야 원래의 그 목적이 모든 이를 향한 것이기 때문에 그대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가 개개인을 따로 만나서 주게 될 가르침은 서로 달라야 합니다.

돼지들은 좋은 진주를 받고서는 그것을 먹는 것으로 착각해서 몇 번 깨물어 본 다음에 자신들이 원하던 맛깔스런 음식이 아니라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는 딱딱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준 사람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가르침도 비슷한 작용을 합니다. 그것은 실제로 사람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지만 세속적인 생각에 가득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그 가르침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대상일 뿐입니다. 그는 오늘도 자신의 쾌락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판에 신앙의 가르침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의무를 되새겨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선한 가르침을 모두 선호한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가르침 앞에서 도로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바람 피는 남자가 듣고 싶은 충고는 어떻게 하면 아내를 잘 속이는가 하는 것이지, 바람 피는 것을 그만두는 것에 대한 거룩한 충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에 맛들인 사람은 죄스런 가르침을 더 좋아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를 개와 돼지의 지위로 전락시키는 법이지요.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