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민주주의’가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독재자 아래에서 신음해 온 이들, 혹은 수장이라는 이들의 횡포에 시달려 온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간절한 소망인 것이고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체제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통하는 완전한 방법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 안에서 자녀들이 게임기를 사고 싶어 난리이고 엄마는 그런 아이들을 마냥 응원해주기만 하는데 집안의 형편을 올바로 파악하는 아버지가 가장의 권위로 그에 대해서 안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상황에서 진정한 ‘공공선’은 자녀들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더 잘 실천하고 있는 중인 셈입니다. 비슷한 상황으로 한 학급의 대다수의 모든 아이들이 놀고 싶어하는 중에 선생님이 와서 아이들에게 절실한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문제는 어떤 형식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참된 길을 걷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국가 체제는 민주주의이기에 그것이 올바로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국가적인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모든 국민들의 의사가 올바로 잘 반영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국민들에게 이로울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바탕이 교회에 적용될 때에 우리는 이상한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교회는 민주적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성직자 중심일까요? 특히나 오늘날 국가의 수장이 탄핵되고 국민들의 의사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자유롭게 드러나는 가운데 교회는 아무래도 뭔가 꽉 막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뜻 국가의 제도에 정반대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무너뜨리고 파괴되어야 할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에 대해서 올바른 분별력을 지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들이 만든 체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리끼리 모여서 하느님을 섬기고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가지 것들을 만들자고 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민주적이지도 또는 성직자 중심적이지도 않은 ‘하느님 중심’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이 가장 완전한 권위를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그분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것을 담은 ‘성경’, 또 그분이 세우신 ‘교회’, 그리고 그분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의 권위가 참으로 중요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시끄러운 잡음이 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올바로 잘 분별해야 하는 것은 과연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백성들의 뜻만을 받들어야 했다면 이미 시나이산에서부터 백성들이 만들어 놓은 금송아지상에 절을 하고 같이 동참하면서 구원의 역사는 끝나 버렸을지 모릅니다. 만일 성직자들의 말이 무조건 옳고 이루어져야 하는 뜻이었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고위 성직 계급의 계략으로 죽음을 당하고 구원사업이 더는 진행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언제라도 들려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그러한 목소리들을 잘 듣고 마땅히 바꾸어야 할 것은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모든 소리를 ‘옳다’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성직자의 구태의연함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수용을 하고 더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신자분들에게 다가가도록 노력하겠지만 대놓고 모든 성직자는 필요 없으니 우리끼리 알아서 하자는 목소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 재정의 투명성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올바르게 수용해서 적용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교회는 그 어떤 외적 자금도 필요 없으니 도움의 손길을 모두 끊으라는 것은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하느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이라는 분명한 주제로 떠올랐고 우리는 그 ‘사랑’을 완수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한다면 모든 것은 가치로운 일이 되겠지만 사랑 없이 일을 한다면 아무리 옳아 보이고 합당해 보이고 정의로워 보이는 일이라도 결국에는 어둠의 영에 의해서 움직인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통하는 완전한 방법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한 가정 안에서 자녀들이 게임기를 사고 싶어 난리이고 엄마는 그런 아이들을 마냥 응원해주기만 하는데 집안의 형편을 올바로 파악하는 아버지가 가장의 권위로 그에 대해서 안된다고 이야기를 하는 상황이라면 이는 ‘민주주의’에 어긋나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상황에서 진정한 ‘공공선’은 자녀들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가 더 잘 실천하고 있는 중인 셈입니다. 비슷한 상황으로 한 학급의 대다수의 모든 아이들이 놀고 싶어하는 중에 선생님이 와서 아이들에게 절실한 수업을 진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문제는 어떤 형식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참된 길을 걷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국가 체제는 민주주의이기에 그것이 올바로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국가적인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하는 데에는 모든 국민들의 의사가 올바로 잘 반영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 많은 국민들에게 이로울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생각의 바탕이 교회에 적용될 때에 우리는 이상한 장면을 목도하게 됩니다. 교회는 민주적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성직자 중심일까요? 특히나 오늘날 국가의 수장이 탄핵되고 국민들의 의사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자유롭게 드러나는 가운데 교회는 아무래도 뭔가 꽉 막혀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언뜻 국가의 제도에 정반대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무너뜨리고 파괴되어야 할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에 대해서 올바른 분별력을 지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람들이 만든 체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우리끼리 모여서 하느님을 섬기고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가지 것들을 만들자고 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민주적이지도 또는 성직자 중심적이지도 않은 ‘하느님 중심’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이 가장 완전한 권위를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그분의 외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것을 담은 ‘성경’, 또 그분이 세우신 ‘교회’, 그리고 그분이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령’의 권위가 참으로 중요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시끄러운 잡음이 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올바로 잘 분별해야 하는 것은 과연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백성들의 뜻만을 받들어야 했다면 이미 시나이산에서부터 백성들이 만들어 놓은 금송아지상에 절을 하고 같이 동참하면서 구원의 역사는 끝나 버렸을지 모릅니다. 만일 성직자들의 말이 무조건 옳고 이루어져야 하는 뜻이었더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공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고위 성직 계급의 계략으로 죽음을 당하고 구원사업이 더는 진행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언제라도 들려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그러한 목소리들을 잘 듣고 마땅히 바꾸어야 할 것은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턱대고 모든 소리를 ‘옳다’고만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성직자의 구태의연함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수용을 하고 더 겸손하고 열린 마음으로 신자분들에게 다가가도록 노력하겠지만 대놓고 모든 성직자는 필요 없으니 우리끼리 알아서 하자는 목소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 재정의 투명성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올바르게 수용해서 적용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교회는 그 어떤 외적 자금도 필요 없으니 도움의 손길을 모두 끊으라는 것은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하느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이라는 분명한 주제로 떠올랐고 우리는 그 ‘사랑’을 완수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모든 일을 한다면 모든 것은 가치로운 일이 되겠지만 사랑 없이 일을 한다면 아무리 옳아 보이고 합당해 보이고 정의로워 보이는 일이라도 결국에는 어둠의 영에 의해서 움직인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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