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나의 백성에게, 너희 곁에 사는 가난한 이에게 돈을 꾸어 주었으면,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 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된다. (탈출 22,24)
우리는 막연히 구약이 잔인하고 미성숙한 가르침을 담은 성경이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 안에서 나오는 피가 튀는 살인의 장면이나 전쟁, 또는 이해하기 힘든 불륜과 복수의 장면들은 누가 읽더라도 그런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하지만 구약은 어느 한 부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책마다 그 진행과정을 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 전체의 흐름과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내면의 뜻을 올바로 알아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안에는 그 뚜렷한 가르침 만으로도 이미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위의 부분입니다. 특히나 ‘돈’에 민감한 우리에게 전해지는 가르침입니다.
누군가 은행에서 일을 하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금리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은 오늘날에는 그 자체로 정당한 이윤 행위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백성들 안에서는 이것이 전혀 다른 면모로 간주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바로 ‘나의 백성’ 즉 하느님의 백성들 사이에 일이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즉, 신자들 사이에서도 돈을 꾸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누구에게 어떻게 꾸어주는 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경은 ‘가난한 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10억원짜리 집에서 사는 이들 가운데 8억원짜리 집에 산다고 가난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나 돈 없다, 가난하다’라는 표현을 바로 이런 상대적인 빈곤을 바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사실 ‘부자’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비교할 대상이 존재하고 그 대상에 비교하면 본인은 가난한 셈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이’라는 것은 정말 생활이 걱정되는 이, 즉 의식주 가운데 한 부분이 심각한 위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 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에게 돈을 꾸어 주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이미 인간의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받는 가운데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빌려대는 돈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만일 정말 그런 이들이 있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돈을 꾸어 주었다면 절대로 그에게 채권자처럼 행세해서도 안되고 이자를 물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갚을 능력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뒤따르는 구절들로 보완이 됩니다.
“너희가 이웃의 겉옷을 담보로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가 덮을 것이라고는 그것뿐이고, 몸을 가릴 것이라고는 그 겉옷뿐인데,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탈출 22,25-26)
우리가 오늘날 겪는 소위 ‘대출과 상환’의 문제는 사실 성경에서 지적하는 바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우리의 돈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정작 가난한 이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선’은 근처도 가 보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볼리비아 시내에서 손을 벌리고 있는 가난한 이에게 동전을 쥐어주면 ‘Dios le pague.’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께서 대신 갚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가난한 이들을 찾고 그들에게 합당한 도움을 아낌없이 줄 때에 하느님은 절대로 그 일을 잊으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자들의 탐욕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들은 이미 가진 것에 감사할 줄을 배우기는 커녕 늘 스스로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창고를 늘리고 더 많은 재물을 모아둘까 걱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에 대해서는 이미 복음서에서 언급한 바가 있지요.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루카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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