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내면의 강도(强度)를 키우기



우리의 피부는 저마다 민감성이 다릅니다. 팔꿈치나 무릎에는 보다 단단한 가죽이 덮여 있고 반대로 입술이나 눈꺼풀 안쪽은 보다 민감한 피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민감한 피부는 아주 사소한 자극에도 그 민감성을 느끼고 반응하게 됩니다. 반면 단단한 가죽은 몸을 보호하고 왠만한 자극에는 둔감하게 되어 있지요.

영혼에 있어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내면이 잘 갖춰져서 튼튼한 영혼이 있는가 하면 유약해서 너무나도 민감한 영혼이 있지요.

우리의 문명은 끊임없이 발전해 왔고 지금의 우리 세대는 과거의 어느 세대보다 문명적인 혜택 속에서 살아갑니다.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스마트 폰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헌데 지금은 모두가 과거 486 컴퓨터의 성능을 크게 웃도는 컴퓨터 장치를 주머니 안에 넣고 다니면서 인터넷으로 서핑을 하고 서로 안부를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문명의 발달은 자연스럽게 ‘편리함’을 향해서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이는 현대 사회의 변화의 물결의 하나의 예시에 불과합니다. 즉 과거에는 우리가 직접 해야 했던 수많은 일들이 지금은 무척이나 편리한 수단들로 대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편리함의 추구는 우리를 ‘불편함’에 대해서 더욱 민감하게 만들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 세대는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민감도가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그로 인해서 ‘관계’가 모두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서로 불편한 것이 있어도 참아 견디던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그것을 바로 바로 표현하고 서로 해체되고 분리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간 관계 안에서는 언제나 마찰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이 마찰을 완화하는 방법은 크게 두가지 입니다. 바로 마찰을 느끼는 내면을 강하게 키우든가 아니면 완충 장치를 두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내면을 강하게 키울 기회는 갈수록 더욱 사라져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이웃 간에 담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고 아파트라는 완벽하게 단절된 공간에 살고 있으며 모든 서비스가 독립적으로 움직여 서로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생활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우린 그걸 ‘발전’이라고 불렀지만 어쩌면 우린 더 소중한 것을 상실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훈련할 합당한 외적 체계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단순히 내면 훈련의 터전 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완충장치’까지도 제공을 합니다. 바로 교회의 가르침이지요. 우리가 교회에 올바로 참여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교회의 올바른 가르침과 더불어 그것을 훈련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랑에 대해서 배워가면서 내 주변의 이웃들과 그것을 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그저 주일미사나 나오는 신자들, 혹은 세례만 받고 쉬고 있는 이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말입니다.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체험하는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그 대상이 됩니다.

우리가 이런 내적 훈련을 올바로 하게 되면 우리는 성장하게 되고 내면이 커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지간한 일에는 크게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고 적잖은 시련도 잘 견뎌내는 사람이 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불평하는 사람, 투덜대는 사람이 사랑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이나 덜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뿐이지요. 하지만 내면이 강한 사람은 ‘사랑’을 시작하게 됩니다.

모쪼록 이런 이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교회의 가치를 올바로 알고 그것을 적용하는 사람, 그리고 그로 인해서 사랑이 커진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