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필리 4,12-14)
바오로가 말하는 ‘환난’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세상적인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편이 어렵거나 지위가 낮아서 고생스러운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바오로 사도는 앞서 그러한 것들에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밝히고 있으니까요.
바오로 사도의 환난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선을 실천하면서 겪게 되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우리는 악을 저질러서 그 결과물을 받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선을 실천하더라도 사람들로부터 환난을 겪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너무나 간단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당신 그렇게 하면 안된다’를 가르치면 그렇게 하고 있는 이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렇게 하는 이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몰라서 하기보다는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강론대에서 아무리 돈에 대한 탐욕을 경계하라고 가르치면 무엇하겠습니까? 결국 돈을 좋아하는 이들을 돈을 쫓아갑니다. 강론대에서 아무리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가르치면 무엇하겠습니까? 증오하는 이들은 서로 증오할 뿐입니다. 강론대에서 아무리 서로 유익한 말을 하고 남에게 해가 되는 말은 피하라고 하면 무엇하겠습니까? 결국 언제나 뒤에서 험담을 하는 사람은 험담을 하게 마련인 것을요.
그렇게 어둠을 실천하는 이들 앞에서 빛에 대해서 증언을 하면 그들은 빛을 받아서 감사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눈이 부시다고 괴로워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물론 최대한 어둠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괴롭지 않도록 조심해서 빛을 비추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빛의 밝기를 조절해서 비춘다고 하더라도 결국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이들에게는 이든 저든 성가신 빛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그 모든 것이 상관 없다고 합니다. 물론 바오로 사도가 풍족하고 배부르게 지낸 적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이 많았을 것입니다. 옥에 갇히고 모함을 당해 법정에 서고 죽음 위험을 여러번 겪으면서도 그는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사명이었으니까요. 다른 인간적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면 그것을 포기하면 그만이었겠지만 바오로 사도의 믿음 안에서는 하느님을 외면하고서는 다른 것이 전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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