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루카 11,32)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마주합니다. 그러한 이들 가운데에는 착실히 갈 길을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제멋대로 길을 결정해서 여기저기에서 부딪히는 사람을 만나기도 합니다. 물론 제 갈 길을 잘 가는 사람들이야 그냥 놔두어도 잘 가겠지요. 문제는 이리 저리 부딪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조언’이 필요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지요. 자꾸 화를 내고 흥분을 하고 누군가와 다투고 싸우고 마음을 어지럽히고 용서하지 못하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히고 물적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언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조언이 주어지고 나면 그때부터 다시 새로이 두 부류가 갈라지게 됩니다. 즉, 조언을 듣고 따르는 이들과 조언을 거부하는 이들이 그 대표적인 두 부류입니다.
조언을 따르는 이들은 더욱더 바람직한 조언과 도움으로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수위를 조절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이제 막 큰 상처에서 회복한 이에게 무리한 운동을 시켜서는 안되고, 또 충분히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지푸라기나 옮기라고 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들에게 저마다에게 상응하는 조력을 주실 것이고 그들은 그들이 시작한 회개의 길을 잘 따라오면 됩니다.
문제는 조언을 듣고도 그것 자체를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다가오는 조언을 한 번 거부할 때마다 그의 내면에 더 큰 공허가 생겨나게 되고 그 자리에 더 큰 악이 들어서게 됩니다. 합당히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의지적으로 거절했기 때문에 그들의 내면에 더 큰 악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이 세대’란 바로 이런 존재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구약의 모든 예언자의 모범을 지니고 있고 그들을 배척한 백성의 어리석음을 눈 앞에 두고도 지금 새로이 나타난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의 가장 큰 표징 앞에서 그것을 배척한 채로 자신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사제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기 위해서 살아가는 경우가 좀처럼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한 사제가 정말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는 마음으로 같이 식사자리에 어울리고 술을 나누면서 기쁨을 나누면 사람들은 앞에서는 박수를 치며 좋아하지만 뒤에서는 그 사제에 대해서 술꾼이라고 험담을 시작합니다. 또 반대로 한 사제가 하느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 기도 생활에 전념하면 사람들은 앞에서는 거룩하다고 엄지를 추켜 들지만 뒤에서는 고리타분하다고 험담을 합니다. 한 본당에 모여든 그 수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호에 따라서 주변을 분별할 뿐이었습니다. 빨간색을 집어들면 그 색깔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반발하고 파란색을 집어들면 그 색깔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반발하는 식이었지요.
모든 사람에게 인기 있는 누군가는 어찌보면 하느님이 실제로 그에게 부여한 사명을 올바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든 이의 마음을 충만하게 만들면서 진리를 선포하는 사목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누군가는 바람을 피우는 유혹에 시달릴 수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서로 다투고 있는 중일 수 있으며, 누군가는 돈 욕심을 잔뜩 내고 있을 수 있는데 그런 모든 이들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지낸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그 어떤 표현도 하지 않고 입을 닫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세대는 과연 어떠한 세대일까요? 복음에서 말하는 ‘이 세대’에서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세대일까요? 아니면 그 세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세대일까요? 분명한 것은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우리는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 목소리가 들리긴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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