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의 자리에서 ‘어르신’이 있습니다. 자신 보다 높은 위치에 머무르는 이라면 누구나 어르신이 될 수 있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그 어르신의 성향에 따라서 행동합니다. 어르신이 술을 좋아하면 뭔가 선물할 때에 술을 가져다 드립니다. 또 어르신이 사납고 매서우면 무언가 고할 것이 있어도 어르신에게 직접 가지 않고 다른 수단을 찾습니다. 우리는 이런 ‘어르신’의 이미지를 우리 부모님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해 오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나 남편에게 호되게 당한 여인은 모든 남성들을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대응이 나오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가장 좋은 분이십니다. 성경 표현대로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매우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아무리 스스로 선함을 지니고 계시고 그것을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애쓰신하 할지라도 그것을 바라다보는 사람이 그렇게 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는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을 준비하고 주려고 노력해도 받으려는 사람이 아예 다가오지도 않는 다음에야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 안에서 만나 본 모든 종류의 권력이라는 것은 대부분 그러한 것이었으니까요. 거기에는 대화가 존재하지 않았고 억압과 폭력 뿐이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이 힘 없는 자들을 무시하고 짓밟는 일이 비일비재했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 하느님을 가장 잘 드러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분이 자신을 산산조각 찢기도록 내어바치면서도 우리에게 드러내신 그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 교회는 그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을까요? 우리는 사람들이 다가오도록 가만 내버려 둘까요? 우리가 선점한 자리라고 뒤늦게 들어오는 이들에게 사납고 매서운 눈길을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 스스로를 ‘어르신’의 자리에 올리려고 시도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저는 과연 이 글을 지극히 추상적인 상상 안에서 쓰는 것일까요? 아니면 실제로 벌어진 여러가지 사건들을 바탕으로 쓰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 사건이란 지금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요?
하느님은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좋은 것을 얻으려면 그분의 선과 자비를 믿고 그분에게 다가설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든 매서운 하느님 아래에서 스스로를 가혹함 속으로 밀어넣는 매서운 삶을 살게 될 것이고 훗날에도 하느님의 사랑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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