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건 무엇을 말할까요? 당연히 그저 쑥스러움이 많은 것을 가지고 복음을 부끄러워한다고 하진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좀 더 심층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복음’ 자체에 대해서 수치를 느낀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이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복음’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이 기뻐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성당에 오면서 느끼는 기쁨의 대상이 바로 ‘복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미 밝히셨듯이 이 세상에는 거짓된 예언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나,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이들까지 속이려고 표징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마르 13,22)
그들은 진정한 기쁨이 될 수 없는 것들, 즉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기쁨을 속여서 신자들에게 이것이 신앙을 지니는 기쁨이라고 속일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들은 헷갈려 하게 됩니다. 자신들은 이러 저러한 것들이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과연 우리에게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사실 그것은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익히 알던 것입니다. 기쁜 소식은 사랑하는 이, 사랑받는 이가 마음에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 동안 그러한 것들을 잘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점점 자라남에 따라서 그 기쁜 소식은 다른 엉뚱한 소식들에 대체되게 됩니다. 즉,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기쁜 소식인 줄을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언제부터인가 옷을 화려하게 입고 외모를 잘 꾸미고 값비싼 음식을 먹고 인기를 많이 얻으면 기쁜 소식이라고 잘못 배워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그런 엉뚱한 기쁜 소식이 등장하게 됩니다. 성당을 지어도 화려하게 지어야 하고 카페도 하나 집어넣어야 하고 쓰지도 않을 공간을 온통 화려한 장식들로 가득 채워 넣어야 하고 사람들의 내면이야 어떻든 여러가지 외적 행사를 치뤄서 사람들을 꽉꽉 채워 넣으면 겉보기도 좋고 자세도 나고 하니 그러한 것이 기쁜 소식인 줄로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에 익숙해진 이에게 진정한 ‘기쁜 소식’을 가져가면 그들은 그 참된 기쁜 소식을 역으로 ‘부끄러워’ 합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서자고 하면 자신들이 지금껏 모으고 쌓아온 것이 가난한 이들의 몫이 될까봐 반대로 그들에게 적절한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반발합니다. 부족하고 못난 이들이 교회에 들어오게 하자고 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누려오던 기득권에 상해가 갈까봐 그러지 말고 도리어 동네의 유력 인사들에게나 찾아가자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스스로를 ‘복음의 봉사자’라고 부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적으로는 너무나도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온갖 외적인 활동들로 자신을 가득 채워서 그것을 드러내는 데에 여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 진정으로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이들은 교회 근처에도 다가오지 못하게 됩니다. 무식하고 상스럽다는 딱지를 단 채로 고상하고 엄숙한 교회에 들어서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들 배를 불리는 것이 복음이 된 그들, 참된 복음을 수치스러워하는 이들이 있으니 오늘 바오로 사도는 당당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복음이 그에게 가하는 환경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 때문에 고초를 겪었습니다. 감옥에도 수차례 갇히고 매도 맞고 죽을 고비도 여러번 넘겼습니다. 그 모두를 복음 때문에 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 참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들은 복음 때문에 고초를 겪기는 커녕 복음을 멀리하고 자신들의 거짓된 복음을 추구합니다.
저마다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이 그들의 복음이 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는 동안 하느님의 참된 복음, 진정한 선과 사랑과 진리의 복음은 사람들의 내면에 설 자리를 잃게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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