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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닢

본당 옆에서 절로 자라난 수박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루카 12,58-59)

실제 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증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다툼의 관계에 있을 때에 이 현세 안에서 그것을 합당하게 해소할 수 있도록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지상에서의 그 내면의 증오가 ‘영원’으로 이어졌을 때 우리는 그 마지막 한 닢을 갚기 전까지는 해방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제일 힘든 부분일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관계’에 대한 문제이지요. 우리는 조용히 살고 싶은데 이든 저든 다른 이와 관계 속에서 충돌이 일어나곤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증오와 원한이 싹이 틉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그 증오의 싹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로 그냥 한켠으로 치워두고 생활을 합니다. 나름 스스로는 ‘참았다’라고 표현을 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무심코 내버린 씨앗에서 싹이 나서 열매가 맺히듯이 마찬가지로 나의 내면 한 켠에 치워둔 그 더러운 씨앗에서 싹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서서 참된 겸손으로 진정으로 용서를 청하여 해소되지 않는 대부분의 씨앗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 그 씨앗들은 우리의 ‘인간성’에서 양분을 얻어 점점 더 자라납니다. 증오는 합리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그 증오의 기반을 더욱 다지고 힘을 실어 나갑니다.

더더욱이 그 증오가 상대를 향해서 표출되어 더는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닐 때는 상황이 심각해집니다. 이는 마치 내 방은 내 마음대로 치울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의 아파트는 그의 허락을 받고 들어가서야 치울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표현되는 ‘고소’에 대한 건은 이미 그 증오가 다른 누군가와 연계되어 나의 죄악이 다른 이의 내면에 증오와 원한으로 작용하고 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점은, 예수님도 적대자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 모든 적대자들과 화해의 시도를 하고 그들의 내면을 모두 풀어 주었어야 했던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건 전혀 다른 경우입니다. 누군가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생활하는 가운데 바로 그 올바른 삶과 충고로 인해서 생기는 적대 세력들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그것은 그들이 방향을 전환하고 올바름으로 나아오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 이미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이가 그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길을 내려놓는 것은 전혀 합당하지 않은 일이 됩니다.

물론 이는 구세주와 사람들 간의 문제가 되겠지요. 일반 사람들 사이에는 저마다 조금씩의 탓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훗날 그 일이 심각해지기 전에 미리 사람들과 화해를 이루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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