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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세속적인 우리의 생각



우리의 무뎌진 정신은 ‘청하라’라는 말만 들으면 세속적인 요소를 떠올리곤 합니다.

‘청하라니 그럼 내가 필요한 돈을 청하면 된다는 말인가보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논리를 신도들에게 적용한 거짓 목자들이 많았습니다. 곧 청하면 뭐든 주신다는 성공의 신앙을 논리로 내세우는 이들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본래의 자리에 두고 우리가 하느님에게로 다가가야 합니다. 즉, 하느님을 우리의 천박한 원의와 갈망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의 드높으신 자리로 내면을 들어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세상의 것들(돈, 명예, 권력, 성공, 미모 등등)입니다. 하지만 이제 생각을 바꿔 봅시다. 하느님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실까요?

바로 이 생각의 전환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올바른 청을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성경의 모든 말씀들은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좋음’의 범위가 상상을 초월해서 단순히 우리가 세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납니다. 이는 마치 초등학생이 생일날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인형을 받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그보다 훨씬 더 좋은 그 아이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장난감을 준비한 것과 비슷합니다.

아버지는 바로 ‘성령’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인 셈이지요. 우리는 청하기만 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습니다. 비록 우리가 자격이 없더라도 꾸준히 청하고 또 청하기만 하면 그렇게 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 이들은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또 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준비하신 유산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제가 방금 언급한 것들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추상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실제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생각을 들어높이다가도 어느샌가 현실로 돌아와서는 이렇게 웅얼대는 것입니다. ‘그런 건 괜찮고 그저 지금 내가 골머리 앓는 일이나 좀 도와주시지…’

하느님은 진리이시고 거짓을 모르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가장 좋은 것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하지만 믿지 못하는 이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보아야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징표 외에는 그들에게 더는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구리뱀 외에는 달리 더 주어질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닫혀서 아무리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듣고 보고 깨달아서 구원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 닫아버린 문이기 때문입니다.

청하십시오. 주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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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문제

고해소 안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만큼 관계가 소중하고 그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이게 어떤 물건이라면 절대로 그 물건과의 관계를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다. 물건은 필요할 때에는 쓰다가 필요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인간관계는 특히나 가족관계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관계는 모두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모와도 배우자와도 자녀와도 친구와도 모두 상호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내가 잘한다고 무조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상대가 잘한다고 그대로 잘 되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는 상호적으로 신경써야 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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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하느님을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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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의문은 어떨까요? 우리 안에 하느님을 알기 힘든 어떤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하느님을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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