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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 대한 경계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루카 12,13-14)

아닌게 아니라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민사소송 문제를 사제 앞에 들고 와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곤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 애시당초 그 탐욕의 시작점을 올바로 분별하고 거기서부터 주의를 기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소송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마음이 탐욕에 너무나 많이 기울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도 수많은 일들이 그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두움을 이미 드러내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옷에 신경을 지독하게 쓰는 사람, 단순히 단정함을 넘어서가 아니라 과하게 옷을 매번 바꿔입고 남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그의 내면에 ‘허영’이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늘 이야기의 주제가 음담패설로 이루어지는 사람은 그의 내면에 ‘음란’이 가득 들어 있음을 말합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곧잘 분노하고 화를 내고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 앞에 와서 누군가를 비방하고 험담하는 사람은 그 안에 ‘증오’와 ‘분노’가 가득 들어있다는 것을 나타내지요.

이처럼 우리는 사람을 만나서 그가 꺼내는 주제를 살펴보면 그의 내면을 이미 알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곧잘 빠져들게 되는 것은 바로 ‘탐욕’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오로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도 표현을 했습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루카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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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문제

고해소 안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만큼 관계가 소중하고 그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이게 어떤 물건이라면 절대로 그 물건과의 관계를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다. 물건은 필요할 때에는 쓰다가 필요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인간관계는 특히나 가족관계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관계는 모두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모와도 배우자와도 자녀와도 친구와도 모두 상호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내가 잘한다고 무조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상대가 잘한다고 그대로 잘 되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는 상호적으로 신경써야 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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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을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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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진보의 도식

선한 사람이 늘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지요. 선하니까 그 선한 성정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선하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것이지 무턱대고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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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식화 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악을 저지르고 뉘우치지도 않는 사람
악을 저지르지만 뉘우치는 사람
악을 알아보고 저지르지 않지만 구체적인 선을 행하지도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약하고 실수를 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약함을 극복하고 악을 분별하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더 많은 선의 일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
선을 실천하면서 타인의 악을 분별하고 그 악을 자신 안에서 녹여내는 사람

물론 여러분의 이해를 위한 것이지 이것이 '공식'은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도식화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한 사람이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오늘은 약하다가 내일은 선에 적극적일수 있고 또 다른 날은 유혹에 빠져 악을 저지르고나서 뉘우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추구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지금의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