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이라는 것은 삼위일체 중의 한 위격이신 분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두 익히 잘 아는 부분입니다. 늘 성호경 안에서 떠올리고 기억하는 분이시고 예수님이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선물하시고 우리 모두에게도 선물하시는 분이시니까요.
그리고 사도행전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부분이 등장을 합니다. (사도행전 2장 참조) 그리고 그때에 그들이 모두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성령대회에서 ‘방언’은 바로 이러한 모습을 흉내낸 부분이지요.
또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2장에서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신령한 언어’를 언급을 합니다. 즉 ‘어떤 이에게는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가, 어떤 이에게는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가 주어집니다.’라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성경 안에서 구체적으로 성령과 그 은사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은사 중 하나인 ‘신령한 언어’에 대해서 그 증거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들입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실행에 대해서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지금 가톨릭 안에서 하고 있는 성령 운동은 어떠한 것이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기도 형태들은 어떻게 수용해야 하는 것일까요?
참고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령쇄신운동’은 다음과 같은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령쇄신운동의 시작
성령쇄신운동은 공의회가 끝난 다음 해인 1966년, 미국 듀케인(Dequesne)대학의 평신도 신학교수들과 젊은이들의 기도모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성령강림을 청하며 주말 피정을 하던 그들은 마음 안에 넘치는 성령을 경험하기 시작하였고 이 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면서 가톨릭 성령쇄신운동은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성령쇄신운동
1971년 한국에 들어온 성령쇄신운동은 1974년 평신도를 위한 첫 성령세미나를 개최 하였고, 2017년 현재 서울 대교구 총 230 본당 중 140 개 본당이 성령기도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성령쇄신운동단체는 성령쇄신봉사회로 개칭되었으며 각 본당에서 개최하는 성령세미나와 본당성령기도회를 통하여 성령쇄신운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쇄신을 통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돌아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활동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성령쇄신봉사회 홈페이지 참조)
물론 성령을 쇄신하자는 취지로 시작한 아름다운 활동이라는 데에는 전혀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은 참으로 소중한 분이시고 마땅히 우리 안에 활동해야 하는 분이시니까요.
하지만 그 구체적인 실행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를 거쳐오면서 다양한 방법들이 시도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지금의 시대에 행하는 구체적인 방법론들은 지금껏 여러 차례의 성령세미나와 성령기도회를 통해서 ‘정착’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자들은 이러한 성령운동에 참여하면서 그 특유한 ‘방법론’ 때문에 어색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합니다. 기존의 엄숙하고 경건한 가톨릭 전례에 비하면 이 운동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적이고 다채로운 체험은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지극히 정상입니다.
성령운동은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령 운동은 하나의 신심 행위로써 우리 가톨릭의 풍부한 문화 유산 속에서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다양한 신심 방법론 중의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나에게 거부감을 일으킨다고 대놓고 반대할 이유도 없고 또 다른 이들에게 무턱대고 해야만 한다고 강요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만, 모든 단체가 그러하듯이 그 안에는 ‘장단점’이 늘 공존할 것입니다. 그리고 장점은 살려야 마땅할 것이지만 단점에 대해서는 그것을 올바로 지적하고 적절한 예방을 하는 것이 좋겠지요.
장점이라면 당연히 성령의 다양한 은사와 열매에 대해서 새로이 일깨워주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받으라고 명하신 성령을 잘 수용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잘 활동할 수 있도록 여지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여기에는 단점도 존재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할을 지나치게 한 측으로 강조를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지요. 즉, 성령은 반드시 시끌벅적해야 하고 또 병의 치유가 수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성령 대회 중에 안수를 받으면 넘어져야 한다는 것이나 신령한 기도를 자신들의 특유한 방법으로만 해야 잘 한다고 생각하는 식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떤 ‘외적 지표’로 자꾸만 드러내고 또 심지어는 과시하고 싶어하는 데에서 오류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성령 기도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모든 신심 단체에도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특정한 신심을 실천함에 있어서 남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일, 외적 행사에 치중하는 일은 누구나 곧잘 빠져드는 유혹 가운데 하나이지요.
성령은 가족을 위해서 조용히 콩나물을 다듬는 할머니 안에서도 활동하시고, 묵묵히 빨래와 설거지를 하는 엄마의 내면에도 활동하시고, 열심히 버스 운전을 하면서 손님들에게 친절을 드러내는 기사 아저씨 안에도 활동하시고, 졸음이 쏟아지지만 참아가며 선생님의 말씀에 성실히 귀를 기울이는 아이에게도 활동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쇄신은 성령의 역할을 상기시키고 새롭게 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자칫 잘못하면 ‘여기 안에만 성령이 있다’ 또는 ‘이런 저런 특정한 행위를 해야만 성령을 받는다’는 식의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학생때 성령 세미나를 받아 보았습니다. 그래서 거기 참여하는 이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는 헤아리고 있습니다. 모든 참가자들이 순수한 성령에 대한 열정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어느정도 저마다의 욕구를 바탕으로 참여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인간의 내면에 고질적으로 존재하는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어하는 마음, 다른 이들보다 앞서고 싶어하는 마음이 늘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방언’, 즉 ‘신령한 언어’라는 것은 단순히 입술과 혀의 기술로 얼마나 빨리 ‘랄랄라’를 외쳐대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령한 언어는 성령으로부터 나오는 언어이고 거룩하고 실천적인 언어입니다. 그것은 누구나 보더라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언어입니다. 그것은 ‘소리’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실천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비록 말을 못해도 착한 사람은 누구나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얼굴의 미소는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법이지요. 때로 과시욕에 사로잡히면 이 ‘방언’을 얼마나 기술적으로 잘 하는지를 드러내려는 경쟁심에 사로잡히게 되고 실제적인 신령한 언어와는 전혀 상관없는 외적인 형태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진정한 성령 쇄신은 인간의 삶의 변화를 수반합니다. 성령 쇄신 봉사를 한다면서 도리어 교만하고 아집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런 봉사는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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