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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이들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고, 너희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며, 나를 물리치는 자는 나를 보내신 분을 물리치는 사람이다. (루카 10,16)

우리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는 그 안에 내재된 의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참으로 다양하지만 근본적으로 두 가지 의도로 나뉘게 됩니다. 바로 선의 의도와 악의 의도이지요.

물론 정상적인 범주에 사는 사람에게는 ‘악의 의도’, 다시 말해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의 의도’, 곧 참된 사랑으로 다른 이를 대하는 이들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즉, 자신에게 득이 되면 하고 반대로 득이 되지 않으면 하지 않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자신의 이 향한 기본 방향성은 곧잘 이기적인 방향으로 변해서 ‘악의 의도’로 변질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다른 이에게 해가 미치더라도 그리 큰 상관을 않게 되는 것이지요. 대기업 회장이 자신의 재산을 증식시키기 위해서 가난한 영세민들의 기본 인권이 큰 상관이 없게 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예언자’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의도를 닮아 살아가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이들이지요. 이들의 생활 모습은 일반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를 지닙니다. 물론 이들에게도 오류가 존재하지만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주파수를 하느님에게 맞추고자 노력하고 그분이 전하려는 선한 의도를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지요.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고 또 나아가서 다른 이들에게도 그 말씀을 전하고자 노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말이 올바로 전해졌을까요? 그게 아니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의 말을 듣기도 했지만 무시하기도 했으며 심한 경우에는 반대로 그들을 박해하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물리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인간적 나약함에 대해서 실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메세지는 언제나 그런 인간적인 나약함을 지닌 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져 왔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지닌 이들이 우리에게 가르침을 전할 때에 우리는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은 단순히 그들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에서 비롯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누가 하느님의 제자일 것입니까? 하느님의 제자됨을 우리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물론 교회가 거룩한 직분으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서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신앙적인 가르침을 전할 때에 우리는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가르침은 그렇게 제한된 영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라면 누구라도 하느님의 본질적인 의도를 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가르침은 단순히 교회의 정식 루트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초등학생인 자녀들의 입을 통해서도, 또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입을 통해서도, 또는 자녀들의 신심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노부모의 입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습니다.

- 여보, 오늘은 일찍 들어오세요.
- 아빠, 이제 술 좀 안마시면 안돼?
- 얘들아, 그래도 신앙생활은 소홀히 하지 말거라.

바로 이러한 말들 안에서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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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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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하느님을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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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의문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체가 알기 힘든 분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단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니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우리가 그분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아예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당신과 닮은 속성이 있어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알아 나가고 배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분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정도로 전제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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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빛을 바라보면 그것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지만 우리의 눈 앞에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선글라스’가 씌워져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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