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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순종



우리는 바로 그분을 통하여 사도직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일깨우려는 것입니다. (로마 1,5)

사도직분은 ‘선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는 예수님이 당신의 사도들을 부르시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는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자’고 모여 만든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사도들의 직분도 위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직분과 그에 종사하는 이들은 교회 공동체에서 민주주의 방식으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로부터 수여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일반 사회에서는 좀처럼 체험하기 힘든 일들이 교회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통상적인 공동체라면 그 공동체의 대표자는 구성원들에 의해 선출이 됩니다. 그래서 그 대표자는 무엇보다도 구성원들의 의견에 귀를 잘 기울여야 하고 자신의 직분을 수행하는 데에 전체의 의견을 잘 반영해야 합니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사회인 셈이지요.

하지만 교회는 그와는 조금 다릅니다. 물론 구성원들의 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고 있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에 앞서는 우선과제가 존재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목자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귀를 올바로 기울이고 거기에 충직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이 사명을 실패한다면 아무리 구성원의 목소리에 귀를 잘 기울이더라도 결국 그의 사명은 실패한 것이 되고 맙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양자는 서로 크게 엇나가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과 상충되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도 ‘양심’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닌 양심은 때로 마비되기도 하니까요.

모든 구성원이 돈을 좋아하고 모든 교회 내의 논리가 경제적인 논리, 효율성의 논리로 흘러갈 때에 사목자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에 반대되는 목소리를 내어야 합니다. 교회는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을 해 주어야 합니다. 외적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기 보다는 내적으로 충실함을 회복하는 것이 더 시급하고 우선적이라고 알려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더 나은 신앙’에 대해서 강조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사목자는 그에 상응하는 충고를 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을 것이고 하느님의 뜻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목자는 내적인 충실성을 더욱 다져야 합니다.

믿음은 인간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고 이성으로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신비적인 영역에 대한 신뢰이고 순종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맹목적인 순종은 피해야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얼마든지 우리의 이성을 통해서 그 합리성을 분별할 수 있고 전혀 엉뚱한 명령에는 정당한 의심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로지 인간적 원의와 합리성 만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은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사회적 단체들도 그렇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근본에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존재합니다. 이를 상실한 신앙은 반드시 그 길을 엇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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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문제

고해소 안에서 마주하는 거의 모든 문제는 ‘관계’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만큼 관계가 소중하고 그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이게 어떤 물건이라면 절대로 그 물건과의 관계를 가지고 오지는 않습니다. 물건은 필요할 때에는 쓰다가 필요가 없으면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인간관계는 특히나 가족관계를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관계가 문제가 됩니다.

일방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관계는 모두 상호적인 것입니다. 부모와도 배우자와도 자녀와도 친구와도 모두 상호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이게 내가 잘한다고 무조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또 상대가 잘한다고 그대로 잘 되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관계는 상호적으로 신경써야 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계약’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 사이에 계약을 끼워두고 그 계약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관계가 유지되다가 계약이 깨어지고 나면 관계가 파괴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들이 근간으로 삼는 계약관계는 이해관계에서 시작되고 그 이해관계를 가늠하는 핵심은 바로 나 자신의 이익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유익한가 아닌가, 나에게 필요한가 아닌가가 핵심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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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소 안에 들어오는 이들은 자신에게 피로감을 안겨주는 관계, 혹은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관계 때문에 힘들어서 다가옵니다. 고해사제는 이 관계를 잘 점검해서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고 그로 인해서 또다시 그들에게 피로감을 주거나 손해를 끼치는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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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을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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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믿음을 가진 척을 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랑이 넘치고 내면이 침착하고 영원에 대한 관심사가 남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믿음을 지닌 사람은 반대로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흉내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면이 불안정하고 언제나 위태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영원에 관심이 없어서 그것을 애써 흉내내어 보지만 결국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관심사가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에 우리가 집중하다보면 상대의 관심사가 드러나게 되고 그의 내면이 분별되게 됩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선한 사람인지 선을 흉내내는 사람인지가 드러나게 되고, 또 기본적으로 선하긴 하지만 어떤 나약함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부분이 보완되어야 하는지도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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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 하느님을 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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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의문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체가 알기 힘든 분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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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의문은 어떨까요? 우리 안에 하느님을 알기 힘든 어떤 시스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물론 하느님을 알 수는 있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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