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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에서의 자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율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는 엄연한 현실이며 다만 오늘날에는 그 명칭과 유형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기본 '법', '규정', '법칙'으로 대변될 수 있는 오늘날의 '율법'은
새로운 '율법주의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먼저 '법', '법칙'이라는 것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법은 왜 생겨나게 된 것일까요?
착하고 의롭게 사는 이들을 위한 것일까요 아니면 그렇지 못한 이들을 위한 것일까요?
바로 후자입니다.
법은 의롭지 못한 이들을 '규제'하기 위해서 나타났고
나아가서 의로운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작점은 '불의한 이들' 때문이니
그들이 사라지는 날에는 '법'도 그 운명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사람을 의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법이 정해져 있고 그 안에 산다고 그 사람이 자동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법은 다만 그의 죄를 더욱 명백히 드러내어 줄 뿐입니다.
그 선을 넘으면 명백한 죄인인 것이 드러날 뿐입니다.

한 사람을 진정 의롭게 만드는 것은 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법 위에 존재하며
단순히 죄를 드러내는 법을 넘어서서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합니다.

이런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니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본당에 도착해서 교사피정을 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런 저런 것들을 가르치고
성사와 미사 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가르치고 난 뒤에
교사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미사 중에 다리를 꼬고 있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성체가 뭔지도 모르고 와서 받아먹는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교회혼을 하지 않고 성체를 모시려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공복재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는데 지켜야 하지 않나요?"

교회에서 무엇이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지 궁금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각각의 질문들에는 교묘한 것이 숨어 있으니
이를 조금 더 명백히 드러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이런 것들을 알고 지키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않는 이들에게 
내가 아는 교회의 확고한 규정대로 뭐라고 해도 되나요?"

감이 오십니까?

소위 '열심히' 산다는 이들이 규정에 대해서 더 상세히 알려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영적 발전을 위한 경우가 아니라
타인의 그릇된 행동을 힐책하고 비난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짐짓 옳음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것입니다.
이 안에 숨어있는 바리사이적인 생각의 구조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거스르지 않을 선을 찾아야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완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다 필요없으니 내던지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미숙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율법은 유효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참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시작한 이들은
이미 율법에서 자유롭습니다.

만일 사랑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어떤 질문을 했을까요?
글쎄요… 그들은 아마 그런 것들을 궁금해할 여지가 크게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에 자기 스스로도 한참 모자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을 물리치지 않으면 되는데,
주기 싫고 물리치고 싶으니 일정한 '선'이 필요한 셈입니다.
사랑하라는 건 알지만 사랑할 수 없고 미워하고 싶으니 어디까지 미워하고 증오해도 되는지가 궁금한 셈입니다.
용서를 하라고 하는데 도대체 몇 번을 해야 하는 것이며,
받아들이고 인정하라고 하는데 그 범위가 궁금한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두느냐?
아닙니다. 당신에게 합당한 권위가 있다면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에게 그럴 권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당신이 한 아이의 아버지라면 그 아이의 사정에 '책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법을 알고 싶어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그 사람에 대해 나의 증오의 정당성을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압니다.
거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법을 들이대고 싶어질 때에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나는 그를 사랑하는가?'하고 말입니다.
만일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당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율법이라 해도 들이대지 마십시오.
오히려 당신 자신과 그에게 더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다 실천적으로 말해서,
누군가의 행위를 고쳐주고 싶은데 그를 바라보면서 내 마음 속에 어두움이 느껴진다면,
그 순간 당장에는 아무런 충고도 하지 마십시오.
왜냐면 그 순간의 충고는 '증오'와 '분노', '성가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진정 충고해 주고 싶다면 여러분 안의 마음이 '사랑' 안에 머물 때 하십시오.
그렇다면 모든 것은 바로세워지게 됩니다.

글이 장황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는
수많은 율법주의자들의 그물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알아 들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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