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남 이야기'를 하고 또 듣게 된다. '누구는 이렇다더라 누구는 저렇다더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아내기 쉽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본 바, 이런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정확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직접 당사자에게 들어본 결과 전혀 다른 내용을 알고 있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남 이야기'를 즐겨 한다.
특히나 한국의 가톨릭 안에서 이 '남 이야기'는 참으로 맛깔스러운 이유가 '성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제나 수도자의 환속 소식이나 그 밖의 여러가지 교회 내의 소식에 우리는 짐짓 점잖은 척 행동하며 최대한 귀를 기울인다. 소위 열심하다는 신자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일반이다. 이들은 사실상 교회 내의 모든 소문의 진원지나 다름이 없다. 이들은 가까이 지내는 사제와 수도자의 구미에 맞는 행동을 하고 그들의 환심을 산 뒤에 그들이 하는 모든 말에 귀를 기울인 다음 2차 정보를 양산해낸다. 객관적인 진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자신의 작은 주석만 붙여주면 제3자를 속이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다. 사제나 수도자분들은 자신의 근처에 다가오는 양의 탈을 한 이리와 같은 이런 이들을 참으로 조심해야 한다. 식사 초대를 하거나 선물을 보내오면서 자리를 만들어 뜬금없이 이런 저런 일들을 물어오는 이들을 조심해야 한다.
'남 이야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정당한 직분을 지닌 사람이 그에게 제대로 된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다. 그런 고로 주임 사제나 주교님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어쩔 수 없이 '남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듣게 된다. 하지만 경험해 본 분들은 알리라. 이런 자리의 사람일수록 남의 이야기를 듣되 최대한 분별있게 들어야 한다. 가능하면 양측 모두의 이야기를 다 듣도록 노력하고 그게 아니면 아예 머릿 속에 그 자리를 만들어 두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런 분별의 위치에 계신 분들이 아닌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남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 주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자신에게 합당한 권한이 있지 않은 이상 우리는 가능한 말을 삼가야 한다. 그리고 '남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를 해야 한다. 내가 살아온 바, 내가 느낀 바를 '믿을 만한 이들'에게 나누는 것이 좋다.
우연찮게 이 글을 읽게 되는 이들 중에서도 '남 이야기'를 즐기는 이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이 절대로 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사람은 오늘의 마음이 내일 달라질 수도 있다. 우리가 함부로 이야기하는 이들의 마음이 오늘 이미 달라져 있음에도 우리는 어제의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과연 그런 이야기를 퍼뜨린 우리가 훗날 하느님 대전 앞에서 되갚아야 할 무게를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조심하고 또 조심할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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