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2주 주일
아브라함에게는 믿음의 자녀들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들은 육에서 나온 자녀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이루어진 가정 공동체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니 바로 본당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사제를 '영적인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자녀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먹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세상의 자녀들이 있고
그들에게는 '멸망' 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엇나간 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성당에 나오긴 하지만 근본 목적에서 한참 어긋나 있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려 성당에 다닙니다.
'자신의 뜻'이라는 게 얼마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인지 그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는 마치 소꿉놀이를 하는 어린 아이가 자기가 흙으로 만든 밥이 너무나 맛있어 보여서
그 놀이를 계속 한답시고 집에 마련해 놓은 진짜 밥을 먹으려 하지 않는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변모와 더불어
세상 것만을 챙기려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이 나옵니다.
드러난 주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묶어 두려고
초막을 지어 바치겠다는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어리석은 말을 내뱉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이에 하늘에서 말씀이 들려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께서 우리 말을 들으셔야 할 것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느님께 떼를 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느님에게 떼를 쓰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대화의 기본'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니
그들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과감히 무시하는 이들입니다.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잔 적이 하루도 없습니다.
결국 방법을 찾다 찾다가 한계에 봉착한 이 사람은 하느님에게 가서 막무가내로 떼를 씁니다.
이렇게 간청을 드리니 어떻게 상황이 나아지도록 도와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는 하느님에게 분통을 터뜨립니다.
만일 이 사람이 이 순간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일 줄만 알았더라도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걱정하지 마라'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모두 지나간다는 그 말씀,
보다 중요한 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그 말씀,
세상은 우리의 육신을 빼앗아가는 그 이상은 어찌할 수 없다는 그 말씀을 들었을 것이고
그는 평화를 회복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려고 노력할 뿐
그 이상 마음을 괴롭히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전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그저 자신의 영혼을 나날이 더욱 피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누군가와의 관계 때문에 애태우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보기 싫은 사람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 누군가의 마음을 사고 싶어 안달이던 사람도
그 순간 침묵 속에서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인다면
'세상 사람 가운데에는 우리를 해치거나 완성시킬 존재가 없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존재를 온전히 완성시킬 수 있다는 그 말씀을 듣고
하느님에게 온전히 마음을 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귀는 닫혀있고 그는 자신의 인간관계에 대한 탐욕에만 온전히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루에 한 마디씩만이라도 듣고 실천한다면
여러분은 나날이 새로워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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