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길이고 진리이십니다. 다양한 방법의 길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 목적지가 마구 변하는 길은 없습니다. 진리 역시도 변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1 더하기 1이 2였다가 내일은 1 더하기 1이 4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만일 무슨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진리 주변의 것들, 진리를 수용하는 대상들입니다.
오늘 군중에게서는 2가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는 칭송과 감탄이었다가 나중에는 분노와 증오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모든 사람은 감탄해 마지 않다가 나중에는 예수님에게 극도의 증오심을 드러냅니다. 이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변덕입니다.
한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다 저렇다 말이 많습니다. 오늘은 그렇게 칭찬해 마지않던 사람을 내일이 되어서는 세상 둘도 없는 적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은 그닥 믿을 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여전히 전능하시고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분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무언가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더 많이 받아들여 모든 것이 가능한 듯 보이다가 어느 순간 그분을 향한 문을 닫아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이고 절망에 빠져 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가진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하느님의 능력을 끌어대어 쓰다가 또 어느 순간 믿음이 사라지고 그 무엇도 믿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도 닥쳐오는 풍랑에 그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물에 빠져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이에게 차별을 두지 않고 똑같이 비처럼 내리는 은총 가운데 더욱 넓적한 대야를 들고 나가는 사람은 더 많은 비를 받아들입니다. 반면 주둥이가 조그만 호리병을 들고 나가면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그릇을 들고 계시면서 어떤 은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그 수많은 과부 가운데 왜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만이 예언자의 방문을 받았고, 그 수많은 나환자 가운데 왜 시리아 사람 나아만 만이 치유를 받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데 왜 누군가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하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했다고 하는지 그 차이를 구별해 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하느님의 자녀들인 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적대자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 나가십니다. 그 변덕스러운 이들 사이의 한가운데를 유유자적하시며 걸어 나가십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진리와 함께 머무르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오늘 제1독서의 마지막 구절을 잊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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