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복음 선포자의 과거

오늘 복음은 참으로 풍부한 보화들을 담고 있는
하나의 감동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이 죽음보다 더 비참한 상태에서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고
그리고 그 얻게 된 구원을 바탕으로
어떻게 복음 선포자가 되어가는지
복음은 하나의 일화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덤에서 사는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이 사람은 죽은 자들이 사는 무덤에 살면서
쇠사슬로 대표되는 인간 사회의 그 어떤 속박에도 메이지 않은 채로
제멋대로 행동하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돌로 제 몸을 찧는 자해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의 상황을 들으며
'어이구… 참 심각하구나…'하고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이 모습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영이 죽은 곳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는 일상에서 더 이상 영신적인 사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이 듭니다.
모두들 물질이나 재화, 혹은 건강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땅에서 나와 결국에는 땅으로 돌아갈 것들 이야기를 하는 셈입니다.
우리야말로 바로 죽은 이들이 사는 '무덤'에서 사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합당한 권위를 거부합니다.
그것을 '자유'라고 부르며 방종에 빠져듭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려는 그분의 규율도 과감히 무시합니다.
돈이나 세상 권력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약간 속이는 정도는
일상화된 일이고
제 주제를 넘어서는 필요 이상의 것을 탐하는 탐욕과
그로 인해서 이웃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은 
누구나 하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주일 미사에 빠졌다고는 고해성사는 꼬박꼬박 보는
형식에 얽매인 신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잔 안의 벌레는 걸러내면서 그 안의 돌은 삼키는 꼴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쇠사슬과 족쇄를 부숴 버리는' 이들입니다.

소음은 도시의 기본입니다.
기도는 하지 않아도 텔레비전은 보아야 합니다.
이 소음은 단순히 귀를 간지럽히는 소리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한시도 마음을 가만히 내버려두지를 못합니다.
뭐든 신경을 쓰고 있어야 도리어 마음이 안정된다고 착각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물리적이고 영신적으로 나를 번잡케 하는 모든 것들에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고 다니는' 이들입니다.

진정 자신을 위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좋다는 일들을 하지만
실제로 그런 행위들이 우리를 해치는 것인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른의 흉내를 낸다며
담배를 말아피우며 자신의 깨끗한 폐를 온통 더럽히는 꼴입니다.
정말 우리가 마음 쏟고 있는 일들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진정 우리를 위하는 일인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일상적으로 같은 행위를 반복합니다.
우리는 '돌로 우리 몸을 치고 있는' 이들입니다.

이제 그 더러운 영에 들린 이와
우리 자신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달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이 영은 예수님을 보자 달려가 '신앙고백'마저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익숙한 부르짖음이 아닙니까?
교회 주변에 머물러 있는 수많은 냉담자들의 같은 목소리입니다.
"신부님, 저는 편하게 살고 싶습니다. 잠시 쉬게 두십시오."
"아, 미사 참례 못하는 거요? 지금 제가 하는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정리되면 돌아오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머리로' 알고는 있지만
그저 '입으로만' 고백할 뿐 실제 삶에서는 전혀 딴판의 생활을 합니다.
이 신앙인들의 이중성은 이 더러운 영에 들린 이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예수님은 단 한 마디로 이 사람 안의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실로 엄청난 권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상황 종료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단 한 마디만 들어도 끝나버릴 상황을
우리는 그분의 수술대에 마음을 내맡길 자신이 없어 주저주저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렇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 사람은 나중에 예수님을 따라가게 해 달라고 청하는데
예수님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사명을 줍니다.
본인 안에서 이루어진 구원을 가족들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뭔가 엄청난 사명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를 가족들과 나누듯이
내 안에 실제로 일어난 일을 가족들과 나누라는 명령이십니다.
그는 그렇게 했고,
나아가서 그 지방 전체에 그 일을 시작합니다.
이에 사람들은 무척 놀라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사람은
바로 그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입니다.
무덤, 쇠사슬, 고함, 자해를 행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하느님의 구원을 알게 되었고,
제 가족인 여러분들 나아가 제가 일하는 볼리비아에 가서
하느님의 구원의 업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차례입니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아멘.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