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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재의 수요일 후 금요일

음식을 끊는 행위로 알려져 있는 단식의 의미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음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과 직결된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꾸준히 에너지를 소비해 가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지극히 느리게나마 죽여 나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을 유지하는 양분의 공급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걸 깨닫는 육신은 우리에게 '배가 고프다'며 비명을 질러 댑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왜 하는 걸까요?
멀쩡히 음식이 있는데 왜 '단식'이라는 행위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누가 누구의 주인인가를 명백히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종은 주인의 명을 따라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종이 아무리 하기 싫어해도 주인의 명이 있으면 해야 합니다.
우리 육의 주인은 영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육신을 따라가면 그것은 상하가 뒤바뀐 꼴이 되고
결국 비참한 모습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우리의 육신을 보살피는 수준을 넘어서서
그 육신의 지배를 받고 육신을 따라가기 시작한다면
그 꼴은 무척이나 비참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잠시 옆길로 새도록 하겠습니다.
소위 '다이어트'를 한다고 육신의 고행을 참아 견디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또 다른 대상에 영을 맡기는 꼴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외모를 꾸미려는 마음,
다른 이에게 못나 보이고 싶지 않다는 허영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식이요법이 건강을 해치는 정도의 비만자들에게 '치료법'으로 주어지지 않는 이상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바라보는 '다이어트'는
자신의 영혼의 빈약함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인 셈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영혼과 육신의 주종관계를 새롭게 하는 이 단식,
하지만 여기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나아가 단식을 하는 행위는 '자선'과 연계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당하게 사용할 수 있는 한 끼 분량의 금액을 아껴서
나보다 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행위,
이로써 단식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행하는 '남는 것의 증여'로써의 자선행위는
하느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기쁨의 열매가 되지 못합니다.
이는 부자가 먹다가 남기는 부스러기를 집 앞 나자로에게 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 성경의 비유에서 부자가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하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그것을 더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비단 돈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노력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지독히 가난한 나라가 아니면 실은 돈보다도 여러분의 시간과 노력을 기다리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 가족 가운데에 외로움에 떨고 있는 이들,
병자들이 바라는 건 여러분이 내던지고 가는 돈이 아니라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입니다.

그럼 단식과 자선의 이 양자구도로 끝이 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는 마지막 하나가 있으니
바로 '기도'입니다.
단식과 자선도 '인간적인 행위'로 그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휴머니즘은 이런 행위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초자연적인 차원'에로 접어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행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인간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 일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마지막 차원을 놓쳐 버린다면
우리는 때로 그릇된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럴 리는 거의 없겠지만, 언젠가 입에 먹을 것을 채우는 것과 그의 영혼을 돌보는 일이 상충될 때에
하느님을 품지 않은 사람은 그의 먹거리를 채우기 위해 투쟁하고
그러는 가운데 영혼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불쌍한 이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내면에 세상을 향한 증오를 쌓아 나가는 이들은
우리 주변에 실제로 존재합니다.
하느님은 이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세상 것을 챙기느라 영원의 것을 잃는 걸 바라시지 않습니다.
이 미요한 구분은 그 일이 실제로 닥쳤을 때에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과 늘 만나고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바라시는 뜻을 실천할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누구는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고, 누구는 사제직을 지망하고,
누구는 해외 선교사 파견을 받고, 누구는 평신도로서 세상 안에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바라시는 뜻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일은 각자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질 때 그 모든 일은 별처럼 빛나게 됩니다.

단식,
이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굶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을 이루는 것이라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를 잊지 말로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문제입니다.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고3 아들 생일인데 전부터 소고기가 먹고 싶다고 난리인 녀석의 투정을 들었지만 남편도 없이 혼자 꾸려나가는 빠듯한 살림에 마음 편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헌데 마침 오늘 근무가 끝나면서 노역 담당자분이 지난 번에 미처 건네지 못한 수당을 지급해서 생각지도 않은 돈이 생겨 기쁜 마음에 집에 오는 길에 소고기를 사 와서 아들과 함께 구워 먹었습니다. 사실 재의 수요일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아침에 우울하게 나가는 아들의 얼굴이 밟혀 사 먹이고 말았습니다."
자, 여러분이라면 이 자매에게 어떤 조언을 해 주시겠습니까? ㅎㅎㅎ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9장 14-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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