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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유혹

사순1주 주일

오늘은 악마의 유혹을 잘 살펴봅시다.

1단계 빵 - 재물
먼저는 빵이 등장합니다. 빵은 우리의 현세 생명을 상징하고
소위 말하는 '먹고 사는' 일과 관련된 것들을 대표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이 먹고 사는 일을 우선시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신앙을 내던지기 일쑤입니다.
학업 전선과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 신앙은 그저 인생의 양념 정도로 생각해 버리고 맙니다.
네, 현세를 자신의 전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시간이 남아돌 때에나 생각해 볼 수 있는 한가한 주제로 다가올 뿐입니다.
당장 먹고 살 고민이 눈앞에 있는데 '신앙' 따위를 고민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은
더 나은 삶의 환경을 위해서라면 양심을 속이는 일은 심심찮게 행합니다.
몇 푼 더 벌 수 있다면 거짓말을 서슴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해집시다.
과연 우리는 없을까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충분히 잘 살고 있는 셈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빵이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굶어서 죽지는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성실히 일하는 이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하십니다.
우리가 기를 쓰고 더 벌려는 이유는
우리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탐욕' 때문이라는 걸…
우리는 쉽게 인정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이 위기를 넘깁니다.

2단계 세계의 모든 나라 - 권력과 명예
빵보다 더 강한 유혹이 있으니 그것은 권력과 명예입니다.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마음, 그들에게서 얻어지는 찬사와 명예는
당장의 빵을 먹지 않고서라도 한 인간이 추구하게 되는 더욱 강력한 차원의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힘 있는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달기 위해서 기를 쓰는 사람들,
'높은 분'이라는 칭송을 받고 그들을 조종하는 위치에 서고자 달음질을 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때로는 '생존'을 소홀히 해 가면서도 그런 일에 헌신하게 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엇나간' 열심쟁이들이ㅏ 있으니
교회의 직분을 '봉사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높은 자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차라리 이런 이들은 제 집안 살림이나 충실히 하는 편이 낫습니다.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인간 군상들의 섬김을 받고자, 
애쓰는 헛된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가 오직 하나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이며
나아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모든 권력의 근원지인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것 뿐입니다.


3단계 하느님을 시험함 - 나 중심
악마는 가장 강력한 유혹의 도구를 들고 돌아옵니다.
이번에는 악마도 준비를 단단히 했습니다.
매번 말씀 앞에서 말문이 막힌 악마가
아예 하느님의 말씀으로 치장을 하고 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들먹이며 예수님에게 그대로 해보라고 요구를 합니다.
재물도, 권력도 이겨낸 예수님이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앞에두고 교묘한 속임수를 통해 하느님에게 도전하기를 종용합니다.
악마의 거짓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느님에게 도전하게 하고 있는 셈입니다.
'네가 그렇게 벌벌 기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어떠냐, 정말 그렇게 하느님의 인정을 받는다면 이 정도 시험이야 뭐 어떠니? 어디 그분이 너를 지켜보고 있나 없나 시험해보지 않겠니?'
우리는 이 마지막 유혹(사실 이런 유혹까지 다가오는 이들은 얼마 되지도 않습니다.)에서 쉽게 무너집니다.
'순명'의 덕에 반대되는 것으로 대변되는 이 마지막의 강력한 유혹은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결국 '내'가 중심이 되려는 우리의 가장 근본에 숨어있는 마음,
악마는 교묘한 틀로 예수님을 이 방향으로 유도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굴하지 않았고,
자신의 의지를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함으로써 이 유혹을 이겨냅니다.
'나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악마는 '다음 기회'를 노리고 떠나가며
예수님의 공생활의 일생동안 수시로 다가왔으며
결국 올리브 동산에서의 그 처절한 기도 중에도,
또 예수님의 죽음 직전에도 다가왔을 것입니다.

이제 사순시기가 시작이 됩니다.
우리 주님이 유혹을 받은 시기를 상징하는 40일 동안
우리 역시도 같은 유혹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의 유혹은
재물인가요? 권력이나 명예인가요?
그도 저도 아니면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오는 '나 중심'의 방향인가요?

세상은 매 순간 우리를 이러한 방향에로 불러들입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장소는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이 싸움을 해 나가야 하며
우리의 주님께서는 승리하셨습니다.
사실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하신 분의 힘에 기댈 수 있습니다.
이 싸움의 심각성을 아는 이들은
하루빨리 마음을 돌이켜 예수님에게로 돌아와야 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의 말씀입니다.
"그대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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