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2주 목요일
먼저 계시라는 것에 대해서 잠시 배우겠습니다.
우리 종교는 계시 종교라서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라면 인간들 사이에 서로 부대껴 가며 서로의 법을 정해서
보다 나은 상위의 질서를 찾아가는 것이겠지요.
대표적인 것으로는 '불교'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계시는 창조때부터 자연 안에 숨어 있기도 하고
또 우리 자신 안에 '양심'이라는 모습으로 숨어 있기도 하며
역사의 시초에 하느님의 개입으로 조금씩 드러나기도 하다가
결국 예수님 때에 와서 온전히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드러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온전한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완전히 드러난 이 계시를 받아들이기까지
여전히 많은 도움이 필요하였으니
이를 사적 계시라 합니다.
유통기한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언제까지는 유효하고 그 기간이 넘어서면 효력이 상실되는 것입니다.
사적 계시들에도 나름의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사랑의 본뜻이 상실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는 유통기한 따위가 존재할 리 없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여러가지 사적인 계시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드러내고
그 사람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기 위해서 보내지는 것이기에
분명히 한계가 드러납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북쪽으로 가야 하는 것을 알고 가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동쪽으로 조금씩 엇나갈 때에 '서쪽으로 조금 수정하라'는 지시를 받고
또 반대로 서쪽으로 엇나갈 때에는 '동쪽으로 조금 수정하라'는 지시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북쪽의 방향은 변하지 않지만 동쪽과 서쪽으로의 수정은 언제라도 변할 수 있게 마련이고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진 이에게 '서쪽으로 수정하라'는 지시는 도리어 그를 더 어긋나게 할 수도 있게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죽은 이가 살아나서 경고를 해 주러 간다면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먹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충격요법이 그들의 삶을 뒤바꾸진 못합니다.
이미 크게 어긋난 길을 단 한 번의 충격으로 바꿀 순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변화의 준비는 단 한번의 특별한 기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내면에서 서서히 준비되어 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 안에서 하는 모든 활동은 같은 방향을 이루고 있으며
그것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세부 활동들로 나누어집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이미 좋은 마음을 지닌 자는 행여 자신이 가담하고 있는 어둠의 행실에서도 마음 속으로 아픔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고
그 아픔이 가중될수록 거기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엇나간 자는 이미 자신이 머물러 있는 은총의 상태를 내던지고 어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들을 찾기 시작합니다.
왜 창녀촌에서 일하던 사람이 어느 날엔가 사회운동가로 변신을 하고
교회의 녹을 먹고 일하던 사람이 나중에는 가장 큰 교회의 적으로 변하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가서 이야기할 적에 마음이 바뀔 사람들 같았으면
이미 주변에서 수도 없이 들어온 예언자들의 말씀에도 마음이 동해서 변화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고
결국 부자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근본 방향을 잘 살피고, 어디로 가고 싶어하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이 사전 작업이 되어 있지 않은 이상은
설령 우리 앞에 죽은 이가 살아나서 죽은 뒤의 사정을 경고한다 해도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로 끝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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