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복음 말씀의 핵심은 이 한 구절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에 '집착'을 하고 살아가곤 하지. '나는 하느님 앞에 어떻게 비춰질까'를 고민하기보다는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있나'하는 명성을 중요시하고 행여 그것이 망쳐지지나 않을까 고민을 하며, 나아가서 그것에 해가 되는 말이나 처신을 당하면 화를 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지. 다른 말로는 '인기'라고도 표현을 하는데 뭐 근처에서 이런 이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아. 그리고 우리 내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을 할려나 싶은 마음, 비판보다는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이 모두 여기에 해당되는 거야. 그래서 헤로데는 사실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는 인물이지.
다음으로는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의 대표격인데. 우리가 지금 가진 생각들은 주로 과거의 일들을 통해서 형성되어 왔지. 그래서 거기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는 노릇이야. 아버지에게 늘 구박을 받으면서 자라온 아이는 '아버지'라는 개념 속에 언제나 '구박하는 존재'라는 걸 품고 살아갈 수 밖에 없고, 전혀 색다른 아버지를 만나도 의심부터 하게 마련이지. 그런 이들이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전혀 다른 걸 상상하곤 한단다. 헤로데는 자신이 죽인 요한을 늘 마음 속에 하나의 어두움으로 간직하고 있었고, 따라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도 즉각적으로 죽은 요한을 떠올리게 된 것이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책'이라고도 하는 개념인데 우리 역시도 이런 마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단다. 하느님께선 이미 용서하신 일을 우리 스스로 다시 돌아가서 마음을 사로잡힌 상태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지.
물론 이 복음에서는 그 밖에도 참으로 많은 묵상거리를 뽑아낼 수 있는데, 증오에 사로잡혀 요한을 죽일 기회만 노리는 헤로디아와 그릇된 이에게 속해 있으면서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결국 죽음에 한 몫을 더하는 그녀의 딸 등등의 인물의 관점에서 또 전혀 색다른 묵상을 할 수도 있을거야. 자기 회사나 사장이 명백하게도 나쁜 일을 하는데도 그 밑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굽신거리며 일하는 상황과 같은 경우에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같은 것들을 추가로 묵상해 볼 수도 있을거야.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꾸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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