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수요일 후 토요일
건강하다는 것이 모든 상태가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병이 들었다는 것은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데 한 인간 존재로서 영이든 육이든 완벽한 존재는 없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우리 모두는 병든 이들임에 틀림이 없거늘
누군가는 자신은 딱히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할는지 모르겠다고
크게 병든 게 없어 보인다고 생각하고 맙니다.
결국 세상에는 영적으로 크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의사의 손길에 맡기려는 사람과
다른 하나는 자신의 부족함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위해서 오셨고
우리가 그 예수님을 필요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병든 상태를 인지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앞에 두고 우리는 우리의 입지를 밝히 드러내게 될 것이니
의사의 치유를 거부하는 고집스런 환자이거나
의사에게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환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의사이신 분은 실력이 대단하신 분이고
그분이 일단 손을 대면 완치율은 100%를 상회하는 수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료사고를 걱정할 일도 없고
그저 우리의 존재를 내어맡기기만 하면 됩니다.
게다가 우리 의사이신 예수님은 인맥도 대단하셔서
이 병원의 최고 공급책인 하느님과 같이 일하고 그분에게서 모든 재료를 다 공급 받으시는데
필요한 은총이며 축복은 물론이고,
때로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할 때에는 아예 새로운 육신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환자들의 고집은 대단해서
아예 병원 근처에도 오지 않거나,
와서도 의사와 실갱이를 하려고 하기 일쑤입니다.
아프니까 살살 해 달라고 하면서 이미 상태가 꽤나 진행된 중증 증세를 드러내 보입니다.
고통 없이 어떻게 그 종양을 덜어내겠습니까?
속은 썩어나는데 그냥 대일밴드 하나만 붙여 줄 수는 없느냐고 징징대는 통에
의사로서는 기가 찰 따름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때로 과감한 수술을 행하시니
그것이 우리 삶 안에서 다가오는 시련들인데
그 고통을 참지 못한 나머지
벌어진 상처를 움켜쥐고는 그냥 그 종양을 안고 옛 삶의 모습대로 살겠다고 뛰쳐나가는 환자도 많습니다.
하지만 일단 한 번 칼을 댄 상처에
우리 의사 선생님께서는 신비한 약을 발라 놓으셔서
결국 돌아오지 않고는 배기지를 못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게 수술을 받은 이들이 하나씩 둘 씩 늘어가서
어느새 퇴원을 하여 이 의사 선생님의 용함을 알리니
그들이 바로 '선교사들'인 셈입니다.
'선교사들'은 결국 '가장 병들었던 이들'인 셈입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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