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의 역할이 여러분들을 돌이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가 하는 역할은 속내에 숨긴 것을 더욱 명백하고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검은 것은 더욱 명백히 검게 드러나고 흰 것은 더욱 명백히 흰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마치 흰 것을 더 희게 만들고 색깔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표백제와 같다고나 할까요.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의지 외에는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이사야 6장 8-10절)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신 이 말씀을 저는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다고 하신 걸까 하고 한동안 고민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감이 옵니다, 결국 마음을 돌이키는 건 우리 자신의 선택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설교자의 사명은 다만 그들의 본심을 드러내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죽어도 사탕을 먹겠노라고 고집하는 아이, 자기 동생의 사탕마저 반드시 빼앗아 먹겠다고 하는 아이를 힘으로 애써 눌러 보았자 그 마음의 근본이 변하지 않는 다음에는 반드시 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나이가 오십이 되는 육십이 되든 돈욕심을 내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 탐욕이 그를 집어삼키고 말지요. 설교자는 다만 그 앞에서 그가 하는 일을 명백히 드러내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똥이 더러운 줄 알면서도 선택하겠다는 스스로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줄 뿐입니다.
저도 이 사실을 명백히 깨닫기 전에는 눈을 감고 있었고 불법을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선과 악을 구분할 줄을 몰랐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처럼 악을 저지르면서 의로운 일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감이 조금 옵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이죠. 그리고는 알게 되었습니다. 제 역할, 복음 선포자로서의 역할은 여러분들을 뒤바꾸어 놓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요. 다만 각자 앞에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을 보다 뚜렷이 보여주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금이 똥(거름)보다 소중하다고 가르치지만 실재로 거름이 한 나무에 하는 영양분의 역할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그렇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차도 전기도 없는 외딴 시골의 농부에게는 쓰잘데없는 금속보다는 거름이 더 소중할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은 이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무시하고 있는 영혼의 가치,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그 영혼의 가치를 오늘날에 되살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지요. 그러면 그걸 알게 된 이들은 자기 나름의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게 되는 셈이지요. 사랑이 미움보다 낫다는 걸 알면서도 미움을 자행하는 이들, 덕행이 돈보다 낫다는 걸 알면서고 돈을 따르게 된 이들은 이미 스스로 선택을 한 셈이니까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는 한 편에 사람들에게 축복의 메신저이면서 다른 한 편에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마음이 선한 이들은 그들을 기꺼이 환영할 것이고 반대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라가던 세상의 한다한 이들에게 그들은 그저 성가신 존재일 뿐이거든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우리 복음 선포자들의 운명은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사실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복음 선포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이 시대에 요구된다는 것 만으로 세상이 그닥 의롭지 않다는 걸 드러내는 셈이고 그렇다면 우리 복음 선포자의 수난은 이미 예고된 셈이나 다름 없습니다. 고상하고 안락한 노후 생활과 죽음은 우리가 복음 선포에 몸 담기 시작한 이후로 물 건너간 셈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러분들은 가족들의 반대부터 받기 시작할 것이며 때로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지독한 외로움에 힘들어 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찬사는 일시적인 것이라는 걸 알고 거기에서 더욱 물러나고 싶어지고 대놓고 여러분들을 비난하고 욕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루카 12장 51절-53절)
하지만 여러분은 그런 일을 당할수록 더욱 '희망'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앙'안에서 여러분의 '사랑'의 행업을 멈추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약속된 상급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이사야서의 말씀을 들어볼까요?
그때에 나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아뢰었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이사야 6장 8-10절)
예수님께서도 인용하신 이 말씀을 저는 참으로 의아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다고 하신 걸까 하고 한동안 고민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감이 옵니다, 결국 마음을 돌이키는 건 우리 자신의 선택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그래서 설교자의 사명은 다만 그들의 본심을 드러내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죽어도 사탕을 먹겠노라고 고집하는 아이, 자기 동생의 사탕마저 반드시 빼앗아 먹겠다고 하는 아이를 힘으로 애써 눌러 보았자 그 마음의 근본이 변하지 않는 다음에는 반드시 원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나이가 오십이 되는 육십이 되든 돈욕심을 내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 탐욕이 그를 집어삼키고 말지요. 설교자는 다만 그 앞에서 그가 하는 일을 명백히 드러내어 주는 것일 뿐입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똥이 더러운 줄 알면서도 선택하겠다는 스스로의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줄 뿐입니다.
저도 이 사실을 명백히 깨닫기 전에는 눈을 감고 있었고 불법을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소위 선과 악을 구분할 줄을 몰랐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처럼 악을 저지르면서 의로운 일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감이 조금 옵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이죠. 그리고는 알게 되었습니다. 제 역할, 복음 선포자로서의 역할은 여러분들을 뒤바꾸어 놓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지요. 다만 각자 앞에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을 보다 뚜렷이 보여주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금이 똥(거름)보다 소중하다고 가르치지만 실재로 거름이 한 나무에 하는 영양분의 역할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그렇게 함부로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차도 전기도 없는 외딴 시골의 농부에게는 쓰잘데없는 금속보다는 거름이 더 소중할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은 이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무시하고 있는 영혼의 가치, 농부이신 하느님께서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그 영혼의 가치를 오늘날에 되살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이지요. 그러면 그걸 알게 된 이들은 자기 나름의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어지게 되는 셈이지요. 사랑이 미움보다 낫다는 걸 알면서도 미움을 자행하는 이들, 덕행이 돈보다 낫다는 걸 알면서고 돈을 따르게 된 이들은 이미 스스로 선택을 한 셈이니까요.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는 한 편에 사람들에게 축복의 메신저이면서 다른 한 편에 증오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마음이 선한 이들은 그들을 기꺼이 환영할 것이고 반대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올라가던 세상의 한다한 이들에게 그들은 그저 성가신 존재일 뿐이거든요. 그래서 어느 정도는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세상 안에서 우리 복음 선포자들의 운명은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요. 사실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면 복음 선포가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이 시대에 요구된다는 것 만으로 세상이 그닥 의롭지 않다는 걸 드러내는 셈이고 그렇다면 우리 복음 선포자의 수난은 이미 예고된 셈이나 다름 없습니다. 고상하고 안락한 노후 생활과 죽음은 우리가 복음 선포에 몸 담기 시작한 이후로 물 건너간 셈이라고 보면 됩니다. 여러분들은 가족들의 반대부터 받기 시작할 것이며 때로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지독한 외로움에 힘들어 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찬사는 일시적인 것이라는 걸 알고 거기에서 더욱 물러나고 싶어지고 대놓고 여러분들을 비난하고 욕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가게 될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루카 12장 51절-53절)
하지만 여러분은 그런 일을 당할수록 더욱 '희망'이 커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 하느님을 향한 굳은 '신앙'안에서 여러분의 '사랑'의 행업을 멈추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약속된 상급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용기를 잃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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