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기적'에 환호한다.
기적을 기다린다.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고 기적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그 기적이 언제나 '좋은'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진짜 기적은 뭘까?
기적은 '이적'과는 다른 것이다.
'이적'은 이상한 일, 기이한 일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적'도 마찬가지로 거기에다 집어넣어 버린다.
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반드시 사람의 내면의 움직임
특히 그 가운데에도 '신앙'과 관계되어 있다.
예수님의 기적은 그저 단순한 신기한 일들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과부가 군중 앞에서 '고백'을 행한 용기,
그것이 예수님이 필요했던 '기적'의 힘이었고
예수님은 솔직하게 대답하는 그 과부의 용기있는 신앙의 고백 앞에
꽤나 흐뭇해 하셨으리라 생각한다.
회당장의 딸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마당에도
예수님은 회당장에게 '믿으라'고 하고 그 응답을 이끌어낸다.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서도 회당장은 꿋꿋이 예수님을 믿고
죽은 딸이 있는 방으로 나아간다.
결국 회당장은 그 응답을 얻는다.
기적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희생'이 필요하다.
하혈하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댓가로
군중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했고
회당장은 딸을 살리는 댓가로
예수님의 호언장담이 거짓으로 드러났을 때에
자신의 위신이 송두리째 무너질 위험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기적'을 앉아서 기다린다.
여러분이 진정 기적을 바란다면
그에 상응하는 '믿음'의 희생이 필요하다.
잘 되면 좋고 안되면 그만이라는 식의 안일한 생각은
그 어떤 기적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특히나 '과학'이 지배하는 이 현대의 세상에
과연 우리는 기적을 이끌어 낼 믿음의 바탕을 어디에서 발견할 것인가?
우리는 그 기적을 위해 나의 소중한 무언가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함부로 기적을 청하는 게 아니다.
함부로 하느님을 시험하지 말라.
기적 때문에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믿었기에 기적이 뒤따르는 것이다.
때로는 운수 좋게 기적을 얻어만난 10명의 나환자도 있지만
그 가운데 '진정한 의미의 기적'을 체험한 이는 오직 1명 뿐이었다.
우리는 이미 그럴 능력마저도 상실한 지 오래이다.
우리가 이미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는 이가 과연 누가 있는가?
우리는 불만 투성이인채로
그것도 모자라 하느님에게 '기적'을 보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나로서는 우리의 배은망덕에
행여 그분이 이미 주셨던 것들을 되찾아가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진정한 기적을 체험하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게 아니다.
그에 상응하는 굳음 믿음을 드러내면 된다.
그걸 어떻게 드러내느냐고?
글쎄다, 사람마다 여건이 다 달라서 꼬집어 규정할 순 없지만,
하느님에게 다가가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세상 안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끊어보면 된다.
그게 뭐냐고?
누구에게는 '돈'이요,
누구에게는 '자존심'이요,
누구에게는 '세상의 정의'요,
누구에게는 '건강'이고
누구에게는 '목숨'이다.
여러분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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