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태 9,13)
이건 이래서 안되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고 합니다. 교회는 조금만 방심하면 행정 사무소가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셈입니다.
되는 걸 알려줘야 합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줘야 합니다. 무턱대고 이래서 곤란하고 저래서 안된다고만 하는 건 예수님께서 바라신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래서 성체를 모시지 못하고 저래서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게 아니라 성체를 모신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우쳐주고 설령 성체가 입에 닿지 않더라도 더 진실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실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래서 고해성사가 막히고 저래서 고해성사를 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만 할 게 아니라 진실한 참회로 하느님 앞에 다가서는 이는 그 누구도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 주어 희망을 심어야 합니다.
온갖 법조문과 규정에 둘러싸여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서히 굳어가고 있습니다. 깨끗하고 깔끔하고 생기있는 양들이나 돌보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원래 예수님의 근본 목적대로 병자와 약자와 죄인을 만나러 나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용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예언자적 소명이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부족하고 모자란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빛과 소금이 존재하는 이유는 빛과 소금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충분히 빛이 가득하고, 짤 대로 짠 신자들과 머무는 것은 교회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신자들이 있다면 빛이 부족하고 소금기가 부족한 다른 세상 사람들을 만나러 내보내야 합니다. 양들이 통통하게 살이 찌는 이유는 더 부족하고 모자란 양들을 목자 앞으로 데려 오기 위함입니다.
자기만 아는 개인적인 구원관은 교회의 근본 목적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낡은 성전을 보수하기 위해서 고심하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집회를 시작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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