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 13,11-12)
사람들이 ‘신비’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알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알기 싫어서 입니다. 즉 신비는 우리의 눈 앞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구미에 당기는 것을 보고 체험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침에 잘 일어나서 가족들과 함께 아침밥을 맛나게 먹고 직장에 나가서 일을 열심히 하고 돌아올 수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그는 하느님의 신비 속에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푹 잘 수 있는 은총과, 자신과 가족의 건강이라는 축복을 지니고 있고, 일할 수 있는 직장도 지니고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겨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것들은 그 의미를 모조리 상실하게 됩니다. 즉, 부동산을 더 구입할 가능성이 있지만 투자할 돈이 모자라서 그 돈을 벌 궁리에 몰두한 사람이라면 그는 거기에 시간을 빼앗기느라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신비의 영역은 우리의 영적인 영역이며,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영역입니다. 가장 값비싸고 유명한 음식을 탐욕스럽게 혼자서 먹는 것보다는 배가 고플 때에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나누는 소박한 식사가 더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물든 이들에게는 이 차이가 전혀 와 닿지 않지요. 그들은 기왕이면 더 값비싼 음식을 먹어야 행복하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고 있으니까요.
바로 이런 이들, 즉 스스로의 문을 닫아버리는 이들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지만 자기 스스로 그것을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셈이지요.
먼 훗날 우리는 아마 깜짝 놀랄지도 모릅니다. 하늘 나라의 참된 기쁨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세상에서 가장 값지다는 것도 하늘 나라의 기쁨에 비하면 먼지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왜 좀 더 세상에서 그 기쁨을 추구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았는가 하며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신비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하루하루는 감사와 기쁨의 연속입니다. 설령 그들의 육신이 가장 중한 병에 걸려서 신음하고 고통 당하고 있다 할지라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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