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판결들이 이 땅에 미치면, 누리의 주민들이 정의를 배우겠기 때문입니다. (이사 26,9)
우리는 가장 냉혹할 때 가장 정의롭다고 착각을 하곤 합니다. 즉 우리의 정의는 차가운 정의인 것입니다. 우리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를 좋아하지만 사랑 없이 그렇게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미에 맞을 때에만 받아 삼키고 그렇지 않으면 내뱉기가 일쑤입니다.
다른 지역에 뭔가 좋지 않은 게 들어선다고 할 때에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바라보다가 그것이 우리 지역에 이루어진다고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나서서 반대합니다. 결국 우리는 참된 정의를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기보다는 나, 혹은 내가 속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그것을 할 뿐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정의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은 가장 넓은 시선을 지니고 계시고 모든 것을 아우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어느 단체에 유익을 따지기 전에 모든 인간의 본질을 꿰뚫고 계시고 그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것을 정치나 다른 권력의 영향으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내면의 변화, 즉 회개를 통해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정치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정치 사범으로 낙인을 찍혔지만 실제로 그분이 하신 일은 일상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와서 정치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것이지 예수님은 정치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가르칠 의도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고 소박한 일상적인 것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도록 도와주신 셈입니다.
하느님이야말로 가장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정의는 너무나 범위가 크고 또한 무한한 자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마치 그분의 정의는 전혀 실행되지 않는 것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분은 악인에게 마저도 당신의 자비의 손길을 뻗치시고 그가 뉘우쳐 회개할 기회를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기에 하느님은 그 어떤 정의도 실행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훗날, 우리가 당신의 나라에 머무를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정의의 거대한 범주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야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셨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자비를 실천하셨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실천하는 정의는 너무나 초라한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정의를 위해서 먼저 사랑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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