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마태 13,49-50)
오늘날 교회는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사람들이 성당에 오지 않는데 거기에다 대고 그런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를 주면 되겠느냐는 것이지요. 이 과학의 시대에 지옥이니 불구덩이니 하는 말은 무식하게 들린다는 생각도 한 몫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진리를 전할 의무가 있습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전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늘 나라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아름다운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분명한 발언을 하셨지요.
악한 이들이 들어갈 곳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 존재하느냐, 불이 실제로 있느냐, 온도는 어떠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꺼려하고 싫어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우리가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고 실제로 고통받을 것이며, 나아가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은 분명한 셈이지요.
그러나 현대인은 ‘증명’을 원합니다. 적어도 이해할 만한 영역의 설명을 원하지요. 과연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지옥이 물리적인 영역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이 물리적으로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과 비슷한 질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생각하고 연구해 내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영혼의 무게를 재었다지만 그 영혼의 물리적인 무게가 우리를 선하게 하지도 악하게 하지도 못하니까요. 오히려 인간이 진실로 추구해야 할 진리의 길을 연구하는 것이 영혼 연구에 더욱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지옥이라는 곳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물리적인 차원에서 연구하고 이해를 시도하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거기에서 겪게 될 고통에 대해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실’의 고통이고 ‘절망’의 고통이지요.
지갑 하나만 잃어버려도 상심하는 우리들입니다. 그 지갑의 쓰임새와 중요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가족을 잃으면 상심이 더욱 커집니다. 사랑하는 존재를 상실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지요. 헌데 우리 존재의 근간을 이루는 분을 상실하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사실 지금의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근본 위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치 공기가 없는 곳을 상상할 수는 있어도 공기가 없는 곳에서 살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이 없는 것을 이렇게 저렇게 유추해 볼 수는 있어도 하느님 없이 살아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때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온갖 기회를 자신의 탐욕과 이기심과 쾌락을 채우는 데에 사용한 이들이 크게 상심하게 되는 때가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잃을 것이고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의 느낌은 마치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 일은 실제로 다가오고 있으며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별다른 의식 없이 살아갑니다. 특별한 죄를 지은 것이 없으니 별 문제 없다는 가벼운 생각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죄, 보다 심각한 죄는 어떤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보다 냉냉한 마음으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더 중한 죄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하는 가장 위험한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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