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 11,25-26)
아버지는 무엇을 드러내신 것일까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지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난 이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분의 선하신 뜻이었지요. 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이 글을 읽으면서도 스스로의 지혜를 동원해서 이해를 하려고 하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영리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은 영리한 머리보다는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맑은 마음은 어떤 방법으로 가질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러한 생각 자체에 오류가 있는 것입니다. 맑은 마음을 ‘소유’하려고 하는 우리의 생각이 바로 우리의 지혜와 슬기를 대변하는 것이지요. 맑은 마음은 어떤 물건처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린이가 어린이가 ‘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일 뿐입니다. 어린이는 그 천성으로 어린이인 것이지요. 굳이 어린이가 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갑니다. 나이를 먹고 지혜가 자라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억지로 무언가를 가지고 얻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지니고 소유하고 얻어냄으로써 어린이가 된다면 그것을 잃을 때에 어린이가 되는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되어감으로 어린이가 된다면 그것은 함부로 잃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셈이지요.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려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무엇이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해서는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에게 사랑이란 국민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이 될 것이며, 의사에게 사랑이란 환자를 정성껏 돌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제에게 사랑이란 신자들에게 영적 양식을 풍부히 먹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수도자에게 사랑이란 스스로를 봉헌하여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성화에 다가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랑은 정해진 방법이나 방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방향만을 제시할 뿐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해서 방향지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사랑의 방향대로 하루하루의 삶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을 찾아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맑은 마음을 지닌 철부지 어린아이가 되어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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