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태 12,7)
한국 교회의 적지 않은 신자들은 아직도 ‘규정’을 궁금해 합니다. 단식에 대한 규정은 어떻게 되는지, 미사에는 어느 대목부터 참례해야 유효한가 하는 등등을 묻곤 하지요. 이미 몇 번이고 반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존의 신자들에게도 잘 모르고 있던 주제이고, 또 새로 탄생한 신자들에게도 궁금한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을 알아두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보다 중요한 것을 잊고 그러한 규정을 챙기곤 하지요. 소를 잃었는데 외양간을 정비해 본들 소용이 없는 셈이지요.
과연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는 막연한 종교적 활동의 이행은 그 무엇도 변화 시키지 못합니다. 때로는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더욱 굳고 단단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하지요. 즉 우리가 실천하는 일련의 규정 이행을 실천하지 않는 다른 이들을 비판하고 비난하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 시대부터, 그 이전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예언자들은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고 양이나 잡아서 대신 바치려는 위선적인 이들을 비판하고는 했지요.
그렇습니다. 나는 전혀 바뀌지 않은 채로 양을 잡아 바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즉 규정만 준수한 채로 나의 근본적인 내면은 여전히 이기적으로 두는 것이 나 자신의 근본적인 변화보다는 훨씬 쉬운 셈이지요.
주일 미사만 참례하고 나면, 그 의무 규정만 지키고 나면 나머지 주일은 내 멋대로 사용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일을 지키는 규정의 본질이 아닌데 말이지요. 주일은 거룩한 날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룩함의 규정’ 즉 한 마리의 양을 잡아 바치고는 나머지를 하느님에게서 빼앗아 내 멋대로 쓰고자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죽도록 사랑하고 싶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사랑을 교묘하게 거부하고자 합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기 싫고, 이웃을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 다른 외적 활동에 치중해서 그것을 채우는 척을 하고는 실제로는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싶은 셈입니다.
예컨대 ‘용서’라는 주제를 앞에 두면 적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것만은 용서 못한다’라는 내적 기준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는 용서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용서의 성경적 배경을 배울 수 있고, 용서라는 단어의 히브리어와 희랍어, 그리고 라틴어의 의미를 배울 수 있지요. 하지만 죽어도 내가 구체적으로 용서해야 할 사람을 떠올리고 싶지는 않은 것입니다. 용서를 생활화하고 실천하고 살고 싶지는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모순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신앙인들이 외적 신앙생활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의 겉꾸민 신앙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희생제물을 바치기를 즐길 뿐, 진정한 자비를 전혀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이기적이고, 여전히 탐욕스러우면서도 규정을 잘 지킨다는 이유 하나로 자기 스스로를 신앙인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진정으로 하느님을 찾는 소박한 이들을 외적 규정을 바탕으로 단죄하기 일쑤입니다. 훗날 그들의 두터운 가면이 벗겨질 때에 얼마나 큰 수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는 하느님만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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