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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마태 10,5-7)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인종이나 지역을 떠난 개념입니다. 이스라엘은 영적인 의미로 주님의 백성을 나타냅니다. 즉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모든 이들은 영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인 것이지요. 이스라엘은 실제로 자신의 믿음을 사는 사람들,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찾아 실천하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때로 ‘길 잃은 양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즉,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에게서 멀어지고 그분의 뜻을 충실히 이행하지 못하는 양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이들에게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늘 나라가 뭔지 이미 배워 알고 있고 따라서 이런 메세지를 통해서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반대의 의미로 ‘다른 민족들’과 ‘사마리아인들’이 등장합니다. 이 역시 지역적인 차원의 뜻이기보다는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들입니다. 다른 민족이 의미하는 것은 하느님의 길과는 상관없는 길을 걷는 이들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길을 걷다가 엇나간 이들이 아니라 애시당초 길이 다른 이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에 ‘적대감’을 품고 있는 이들입니다. 단순히 다른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길을 가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려는 자들이지요.

그럼 성당에 나와서 세례를 받으면 자동으로 이스라엘이 되고, 반대로 성당을 다니지 않으면 자동으로 다른 민족과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일까요?

바로 여기에서 큰 착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스라엘이 되는 것은 참된 믿음으로 하느님의 길을 따르는 이들을 말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신분 증명서 종교란에 적는 글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길을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반대로 비록 아직은 세례를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하느님을 마음에 품고 올바름을 실천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들이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이고 그들을 위해서 우리는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민족들은 단순히 교회 영역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사고를 지닌 사람들이 상당수 교회 안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재산과 명예와 권력의 종이 된 그들은 하느님마저도 이용하는 부류들입니다.

나아가 사마리아인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들은 단순히 다른 길을 가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들을 예의주시 하면서 행여 있을 수 있는 오류를 바탕으로 비판하고 비난하고 적개심을 품고, 또 서로 이간질을 시키는 아주 나쁜 부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민족들이 가는 공허하고 헛된 길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인들이 모여 있는 고을도 가능하면 피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명은 뚜렷합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려야 하는 소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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