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영혼의 과학


과학이라는 것을 보이는 물질 세계 안에서 법칙을 찾아내고 그것을 다시 삶 안에 적용시켜서 여러가지 것들을 이루어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실 영성 안에도 과학이 있습니다.

사실 과학이라는 것은 ‘자연과학’에 치중된 것입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세상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인간의 내면의 흐름 역시도 엄연히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물질적인 세계와 연관을 맺고 살아가는 그 저변에는 언제나 내적인 요소들이 있게 마련이지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내적이고 영적인 이유들이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술을 마시는 데에 길들어져 있다면 그는 친구들이 초대하는 술자리를 거절하기가 상당히 힘이 들 것입니다. 이는 마치 중력이 바닥을 향해서 작용하고 있어서 아무리 가벼운 종이라도 결국에는 그 무게에 따라 아래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원리이지요. 단, 그 종이에 역방향으로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내면의 움직임도 그 주된 ‘욕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다른 욕구가 생겨나지 않는 이상은 그 방향 그대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주된 내면의 힘의 작용은 크게 두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에로의 방향이 있습니다. 이기적인 방향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방향성에 의존해 살아갑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자기 자신에로 향하는 움직임을 따라 살아가게끔 되어 있지요. 필요하다면 다른 모든 것들을 희생 해서라도 이 방향성을 고수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방향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임을 자각하게 되면서 무언가를 느끼게 됩니다. 즉, 다른 이들의 방향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자각이 일어나지요. 자기 자신의 이기적 욕구를 채우되 다른 이들의 욕구도 존중해야 나의 욕구도 존중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고통스러운 게 싫으면 나도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셈입니다. 이것을 휴머니즘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기초적인 윤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혀 다른 것이 존재하니 바로 ‘하느님의 뜻’을 배워 알게 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물질 세계와 우리 내면의 보이지 않는 영역을 창조하신 분이 있다는 것을 전해 듣고 그분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던지 거부하던지 하는 선택지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존재하는 분을 거절한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은 이 부분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거절하고 살아갑니다. 바로 ‘과학’을 신뢰한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지요. 간단하게 말해서 보이지 않고 증명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다 내적인 이유는 전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영역, 창조주라는 영역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욕구’를 내려 놓고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는 전혀 색다른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지요. 휴머니즘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이 제 3의 영역, 즉 신앙의 영역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세상의 자녀들이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거부하게 됩니다. 도저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고 여전히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고 싶다는 결심을 스스로 내리는 것이지요. 서로 부딪히지 않고 살아가는 휴머니즘까지는 이해를 하겠는데 나의 욕구가 아닌 제 3의 뜻을 뒤따르면서 나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데에 이르지는 못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으로 이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세상의 모든 사물이 중력의 방향으로 내려가는 데에 반해, 그 역의 방향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원하는 이들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중에 중력과 전혀 반대되는 방향으로 하늘을 날아오르는 이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는 참으로 미미합니다. 그 선택을 실제로 진지하게 하는 이들이 그만큼 없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이 익숙한 방향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인기를 얻고, 권력을 쥐는 방향입니다. 몇 번이고 다른 방향을 소개하더라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시 중력의 방향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것이지요.

하지만 과연 그 세상의 중력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허무 뿐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고, 유명세를 타고 권력을 쥐더라도 그 마지막은 언제나 같습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겪게 되고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은 허무로 돌아가는 셈이지요.

반대의 방향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것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요. 그리고 그분의 다른 별명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이신 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의 행복은 얼마나 사랑하고 사랑 받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좀처럼 깨닫지 못합니다.

숨겨진 것이 하나 있으니, 사실 영혼의 중력장은 아래가 아니라 위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위를 향하도록 방향 지워져 있던 존재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땅에서 비롯해서 땅으로 돌아가지만 우리의 영혼은 위에서 와서 위로 돌아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우리는 시작부터 위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진리들이 사람들에게는 숨겨져 있고 가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장님이 된 이들입니다.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눈 앞에 있는데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이지요. 악마의 유혹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고 사람들은 빛과 어둠의 선택지 앞에서 스스로의 선택을 합니다. 여전히 하느님의 일꾼들은 사람들을 빛으로 초대하고자 일을 합니다. 과연 우리가 어떤 위치에 서게 될 지, 즉 어둠을 향해서 넓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될지, 빛을 향해서 좁은 길을 나서는 이들이 될지, 아니면 사람들을 빛으로 초대하는 일꾼들이 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