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욕구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원하지 않으면 활동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원할까요? 가장 기본적으로 육신의 요구를 충족시키기를 원합니다. 배가 고프고, 잠을 잘 자고 싶고, 춥거나 덥지 않기를 바라지요. 고통을 겪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욕구에 따라서 가장 기본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즉 ‘생존’이라는 활동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먹고 살기 위해서 최소한의 일을 합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노동을 하지는 않더라도 아무리 게을러도 밥을 입에 떠넣기는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이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면 비로소 두번째 욕구가 시작되게 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싶어합니다. 호기심이 있는 존재이지요. 동물들도 호기심이 있습니다. 고양이를 새로운 장소에 놓아두면 이리 저리 두리번거리며 탐색을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뭔가를 배우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합니다. 교육이라는 활동이 따로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일상 안에서도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정보를 주고 받고, 또 온갖 것들을 바라보고 듣고 하면서 매순간 무언가를 정신에 채워 넣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내면에는 숨겨져 있는 욕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서 나오는 것으로 자유의지와 상관이 있으며 우리가 결정하는 욕구입니다. 이 깊은 내면의 방향성 속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 아닌 전능한 존재’를 향한 외적인 방향과 ‘순전히 나’를 향한 이기적인 방향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정을 하고 두 방향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물론 ‘전능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들에게도 이미 내적으로 일종의 잣대가 존재합니다. 우리가 흔히 양심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아무리 배우지 못한 아이라도 다른 이들에게 해코지를 하면 안된다는 것, 즉 내가 다른 아이를 때려서 울리고 내가 그것을 보고 낄낄대고 웃는다는 것은 좀 이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당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해서도 안되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요.
그러나 사람은 때가 되면 ‘전능하신 존재’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저 나름의 종교 안에서 ‘신’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나를 벗어나서 보다 선하고 뛰어난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이 시작됩니다. 즉, 여전히 나의 이기적인 욕구들을 충족시킬 것인지, 아니면 외적인 올바른 길을 향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인지 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영혼의 욕구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전능하신 존재, 즉 가톨릭에서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을 찾아 헤메는 것이지요. 그리고 정반대의 방향으로 영혼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을 충족 시키려는 악한 욕구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 두 방향성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내면 안에서 방향성을 형성하고 그가 하는 모든 활동을 규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배우는 사람이 있고, 이기적인 목적으로 배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사람을 수술하고 살리기 위해서 의사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바탕으로 돈을 빼앗아 향락을 누리기 위해서 의사로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먹어도 하느님을 위해서 먹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이기적인 쾌락을 충족 시키기 위해서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모든 활동은 외적으로는 동일해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마치 동일한 조건의 두 차량이 운전자가 원하는 것에 따라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도 가장 내면의 영혼의 방향성에 따라서 전혀 다른 두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향성과 그것을 향한 추구가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짓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세상 만물의 주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훗날 그 값을 치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제 목숨 하나 어쩔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으면 이미 때는 늦은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사명을 수행하라고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을 모조리 탕진한 셈이 됩니다. 전혀 나누지도 않고, 돕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이기적인 목적 하에서만 사용하고 쓰고 소모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은 전혀 다른 모습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목적 하에서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 마저도 거스를 때가 있습니다. 즉 생존과는 전혀 무관한 움직임, 즉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나서서 돕기도 하고 그가 겪어야 할 고통을 나누어 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변화의 과정 중에 있는 셈입니다. 그들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고, 이기성에서 하느님을 향한 이타성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솔직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행하는 수많은 활동 중에는 ‘위선적’인 것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로 하느님을 모든 것을 동원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비결이고 구원되는 비결입니다. 그 밖의 다른 길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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