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마태 13,52)

이 짧은 문장에는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 나라의 제자’라는 단어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이 하느님의 제자가 된 이들, 즉 새로운 것을 배워 알게 된 이들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율법 학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을 아는 사람, 옛 것, 즉 율법에 익숙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곳간’이라는 것은 우리가 내면에 지니고 있는 가치들이 머무는 곳이지요. 익히 쌓은 덕도 그 곳간에 있고 새로이 쌓은 덕도 그 곳간에 있습니다. 바로 우리 영혼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영혼에 무언가를 담아 놓을 수도 있고, 또 거기에서 무언가를 꺼낼 수 도 있습니다.

옛것 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옛것을 꺼내고, 새것 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새것을 꺼낼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 학자가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면 그 양자를 원하는 때에 꺼낼 수 있게 됩니다.

자, 이제 추상적인 이야기는 잠시 옆으로 제쳐두고 이제 실제적인 문제를 건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금육을 지켜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만일 옛것에만 익숙한 율법학자라면 답은 간단합니다. 금육은 지켜야 하고, 연령은 몇 살부터 몇 살까지, 그리고 지키는 날짜는 무엇무엇이며 지켜야 할 항목은 이러저러한 종류의 육류이고 그 와중에 허락되는 종류의 음식은 이러저러한 것입니다. 그리고 따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예외’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 학자는 전혀 다른 설명을 할 것입니다. 그는 질문자의 의도를 알 것이고, 그가 처한 상황을 알 것이며 여러가지 것들을 면밀히 살핀 후에 그에게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율법과 전혀 상관이 없는 대답도 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사랑에서 나오는 대답을 말이지요. 그것은 금육에 대한 율법 규정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되겠지요.

예컨대 연세가 드시고 치매끼가 있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신 시어머니가 뜬금없이 재의 수요일에 고깃국을 먹고 싶다고 할 때, 정통 가톨릭 신자인 며느리는 자신 앞에 닥친 실제적인 문제 앞에서 혼란이 오게 될 것이고 시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 사이에서 혼란을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바로 사제의 도움을 청하게 되겠지요. 사제는 신학을 배운 나름의 율법 학자로서 분별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제자인 그 사제는 그 신자 며느리에게 ‘걱정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시어머니가 원하는 요리를 해 드리세요.’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사랑은 법을 이깁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지닌 모든 것들은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우리를 얽어 매어서 사랑을 제한하게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에만 사로잡힌 사람은 이를 올바로 실천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법은 명확합니다. 분명한 선을 그어주지요. 그래서 법이 그어놓은 선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사랑은 법을 넘어섭니다. 사랑은 법이 쳐 놓은 울타리를 벗어나 그 밖으로 나아가 길 잃은 양을 찾아 헤메고 그 양을 찾아서 어깨에 메고 돌아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여기 있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법을 준수하고 법의 시종이 되기 위해서 존재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곳간에서 새것과 옛것을 그때그때 꺼내는 훌륭한 율법 학자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