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마태 13,29-30)
그냥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냥 두는 게 아니지요. 하느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일꾼들에게 일러 가라지를 걸러낼 것이라고 말이지요. 일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좀 더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무엇이든지 속전 속결 하려고 합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결과를 보고 싶어하고 적어도 내 생이 끝나기 전에는 그 결과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적지 않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보면서 답답해 하는 것입니다. 본인들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중에 자녀들이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하니 답답할 수 밖에요.
하지만 하느님은 보다 넓은 구도에서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그에 합당한 기회를 선사하시고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나서 그 모든 기회들이 무산되었을 때에는 당신이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시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자비롭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의 죄악을 덮고도 남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또한 정의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정의가 실현될 떼에 세상의 모든 의인들이 환호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 살아 숨쉬는 동안에는 하느님은 ‘자비’의 모습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 측에서 답답해 하기도 합니다. ‘저 인간은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면서 우리 스스로를 하느님의 자리에 올려 놓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기회를 주시려는데 우리가 나서서 심판하려는 교만함에 사로잡혀 살아가기도 합니다.
그냥 두십시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그냥 두십시오. 행여 가라지가 밀을 물들여 좋은 밀마저 가라지가 될 걱정일랑 접어 두십시오. 하느님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좋은 밀이 아무런 도움도 얻지 못한 채로 가라지가 되도록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적절한 기회를 주실 것이고 밀은 스스로 선택하게 될 것입니다. 가라지 측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가라지가 될 가능성을 잔뜩 지니고 태어나더라도 하느님은 그에게 결정적인 순간에 밀이 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을 하느님에게 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만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할 뿐입니다.
도저히 용서를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는 셈입니다. 결국 스스로 가라지로 남겠다고 선언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가 자신에게는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선언하는 셈이니 자기 스스로를 하느님보다 더 높은 곳에 두는 오류를 범하는 셈이지요. 교만은 참으로 지독한 범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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