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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소망


없다가 생기면 감사하고,
있다가 사라지면 아쉬운 법입니다.

우리에겐 모두 없다가 얻게 된 것임에도
우리가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인지하는 세상은
있다가 사라져 가기만 하니
자꾸자꾸 성질낼 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고급'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 하찮아 보일 뿐이고,
더 나은 것, 더 질 높은 것, 더 재미난 것을 찾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오, 하느님 저희들을 용서하소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모릅니다.

새해에는 '절제'를 실천해 보았으면 합니다.
스스로 삼가는 가운데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마저
절제를 해 본다면,
우리는 비로소 그것들의 가치를 재발견 할 수 있게 됩니다.

때로는 하루 24시간 굶주림을 체험도 해 봅시다.
그러고 나면 고작 남는 돈 몇 푼을 보내면서
우리가 아프리카 아이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한다는 말이
거의 거짓말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도움은 상대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선은
잃어본 적도 없고 아쉬워 본 적도 없는 우리로서는
부자가 매일 매일 지나치면서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집 앞의 거지 나자로에게 식탁의 부스러기나 쥐어주는 것과 진배 없기 때문입니다.

새해에는 이런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늘었으면 합니다.
남는 게 아니라 소중한 걸 나누는 사람,
그것이 돈이든 시간이든 나의 노력이든,
남을 위해서 나를 내어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방법이고,
그것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가 되는 방법이며,
그것이 우리가 영원한 생명에 합당한 자격을 얻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영원한 생명을 끌어당길 수는 없습니다.
영생은 오직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노력으로
하느님께서 거들떠 보지도 않는
배은망덕한 자들의 무리,
자기의 배를 신으로 섬기는 이들의 무리에서 나올 수는 있습니다.
그 무리에서 벗어난 뒤에는,
그저 주님의 선물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주님은 약속에 성실하신 분이시라
약속한 상급 그 이상으로 풍성히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 해가 지나가고 새로운 해가 다가왔습니다.
이제를 때를 충만히 채워야 할 시기가 왔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반짝 하고 사라졌지만
그분이 여전히 우리에게 소중하고
이전 세대와 앞으로 다가올 모든 세대에 중요한 이유는
때를 채우며 살아간 그분의 삶 때문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입니다.
때를 가득히 채우는 하루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기우에서 말씀드립니다만,
때를 가득히 채운다고 뭔가를 죽어라고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여러분도 이제 아시지요? ㅎㅎㅎ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길을 천천히 걸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먹을 때 먹고, 일할 때 일하며, 쉴 때 쉬고, 놀 때 노시길...)

새해 주님의 축복 가득 전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에게 사제 강복 드립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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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