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역시 나약한 사람이라 유혹의 메커니즘에 대해서 잘 '체험하고' 있습니다.
유혹은 무엇보다 우리의 불찰에서 들어오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통로는 우리의 눈, 즉 시각입니다.
우리는 사물을 바라봄으로 인해서 사물을 인지함과 동시에
사물을 원하는 과오에 빠져들게 됩니다.
우리가 지닌 눈이 없었더라면 그만큼 바라게 되는 사물도 줄어들었을 것이고
우리가 쉽사리 빠져들게 되는 수많은 유혹거리에서도 안전했을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불가능'해서 하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덕이 되지 못합니다.
'가능'함에도 우리 스스로 선택하지 않을 때에 비로소 우리의 마음이 커 나갑니다.
미각과 후각 역시도 떼어놓을 수 없는 유혹거리의 하나입니다.
일상적으로 찾게 되는 맛있는 음식은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하고
그 음식의 맛과 향에 취하는 순간 본래의 의미에서 멀어져
우리를 탐욕스러움에로 이끌어갑니다.
아리따운 소리를 인지하는 청각 역시도 유혹의 대상입니다.
차분하고 거룩한 음악은 그 자체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가기도 하지만
퇴폐적이고 유혹적인 가사가 담긴 거친 음악들이 청소년들의 이성을 물들여가는 현실입니다.
저도 이제 늙은 건지 요즘 나오는 노래들은 더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촉각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따스하고 포근한 그 느낌, 성적인 무언가를 느끼고 추구하게 되는 섬세한 감촉 역시도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사람에게 이 감각들을 선물하셔서 당신이 마련하신 아름다운 것들을 느끼게 하시면서 당신을 찾아 오라고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을 알기 위해 마련된" 이 은총의 선물들을 오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합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은 거울을 바라보면서 자기 꾸미기에 헌신하고 연예인들의 화려함과 사치스런 물건들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잠식시키고 맙니다. 미각과 후각 역시도 그저 우리의 건강을 유지하는 정도의 맛있고 향그러운 음식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혀와 코의 고삐풀린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달음질 치고 있습니다. 청각은 사랑의 언어, 대화를 듣기 위해서 존재하기 보다 기괴한 소리, 이웃을 험담하는 소리에 더욱 열리게 되고, 촉각은 애정어린 쓰다듬음이 아니라 쾌락의 정점을 위해서 허락되지 않은 관계를 탐하기 시작합니다.
현대 세계는 이제 더 이상 감각을 내팽개쳐두어서는 안됩니다. 과거 우리에게 전기도 텔레비전이 없고, 패스트푸드가 없던 시절에는 느긋하게 살면서 저절로 절제가 되고 저절로 인내를 키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잠시만 한 눈을 팔아도 무절제한 영상, 음향, 음식과 향, 그리고 육의 쾌락이 모든 오감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끊어야 할 시기입니다. 과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머물면서 단식할 필요가 없었지만, 지금은 단식의 시기가 되었습니다. 귀와 눈을 닫고 가능하면 고요히 머무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감각에 자물쇠를 닫아걸 때에 비로소 영적인 감각이 살아나게 됩니다. 배가 부른 돼지는 성찰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감각의 차단을 영혼의 첫번째 밤, 감각의 밤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더 심오하고 더 면밀히 서술되어 있으니 시간이 있으신 분들은 '가르멜의 산길'을 구해서 읽어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저로서는 여러분들과 동시대의 사람이자 같은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으로서 좀 더 편안하게 서술해 보았습니다. 여러분의 영적 여정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