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주님 세례 축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이사야서 42,1-4.6-7>
세례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면을 지닙니다.
하나는 이전의 삶을 단절하고 새로운 신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앞으로의 삶의 방향성을 갖고 그것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서의 하느님의 종에 관한 서술은
이 두 가지 면모를 너무나 명료하고 아름다운 구절들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1) 내가 붙들어 주는 이, 선택한 이, 마음에 드는 이, 나의 영을 준 이.
세상 안에 얼마나 자기 잘난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번 돈, 나의 명예, 나의 자존심, 나의 학교, 나의 지역, 나의 나라… 이 모든 '나'라는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조차도 선택을 하고 내가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성당'에 왔고 내가 고생해서 '세례'를 받았으며 당장에라도 귀찮아서 떨어져나가고 싶은 신앙생활을 내가 '유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오늘 이사야서의 복음은 '하느님의 권능과 전능'을 무한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종의 특징은 하느님에게 존재의 주도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뭘 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붙들어 주고(놓으면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선택하고(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마음에 들고(하느님과 그분의 뜻이 우리 마음에 들고 안들고는 아무 요건이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영을 주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지만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영을 잘 보살피기 위한 보조수단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영을 주셨습니다.)
2) 공정 - 외치지도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는다.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며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공정함, 올바름이라는 것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올바름을 '철두철미함' 또는 '완벽한 구분'과 혼동합니다. 이런 것들은 물질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애써 구하려는 것입니다. 진정한 공정함, 올바름은 철두철미하고 완벽하게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갈라져 있는 둘을 하나로 뭉치는 것입니다. 흔히 눈에 드러나게 죄를 지은 사람을 앞에 두고 우리는 '공정'이랍시며 그를 심판하고 판단하여 공동체에서 뚝 떼어 놓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진정한 공정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부러진 마음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영혼의 숨결을 끄지 않으며 오히려 그런 마음을 보살피고 되살리고자 노력합니다.
3) 주님의 종이 하는 일 - 하느님과의 계약, 민족들의 빛, 눈을 뜨게 하고, 갇혀 있는 이들을 해방시킴
이 모든 일을 완벽하게 이루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와 하느님과의 사이에 맺어진 계약입니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예수님이라는 약속에 동참하게 되면 당연히 약속된 것을 받게 됩니다. 결국 이 약속은 하느님이 우리 모두에게 건네주는 약속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전해진 이 약속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의 복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 말입니다.
이 예수님은 민족들에게 빛이 되어 전에 보지 못하던 사물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전에는 돈을 벌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면, 이제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하기 위해서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합니다. 이 거룩한 가치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같은 보다 높은 빛의 조명을 받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사물들을 제대로 보게 됩니다. 물질이란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이지, 우리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보다 높은 것들을 위해 헌신해야 하고 결국 하느님에게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깨달은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음의 일을 합니다. 그것은 다른 이들의 눈을 뜨게 하고 갇혀 있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상투적인 말로 '선교'라고 표현되는 이 말은 그저 우리의 종교생활을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가 바라보는 것처럼 진정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도와주고, 그들이 현재 갇혀 있는 상황에서 해방시켜 주는 일입니다. 그들이 진정 굶주린다면 먹을 것을 주어야 하고, 영적인 양식이 필요하다면 영적인 양식을 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어둠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의 용서를 전해주고, 그들이 교만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 교만을 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그저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적선한다고 그들을 가난에서 해방시켜 준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진정한 해방은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반목하는 두 사람을 진정으로 그 전쟁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그저 그 싸움의 순간을 뜯어말리는 것으로 모든 일이 완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의 내면을 올곧게 바로세우는 작업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에서 말하는 성령과 불의 세례입니다. 물은 우리의 껍데기를 씻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로 그치지만, 성령과 불을 통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의 내면이 완전히 변모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의 세례 축일은 주님께서 세례를 통해 죄를 씻은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세례 성사를 성령과 불로 새로이 세례 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불과 성령으로 세례 주시려고 하십니다. 이제는 수동적이고 소극적이고 틀에 박힌 신앙생활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다음의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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